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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판에서 빠진 것들을 상기하다, <라디오 스타>

<라디오 스타>의 훈훈함에 들어있는 미덕과 한계

<라디오 스타>는 이준익 감독과 최석환 작가가 호흡을 맞춘 세 번째 작품이다. 두 전작 <황산벌>(2003)과 <왕의 남자>(2005)가 역사적인 패자(敗者)들의 이야기였듯, <라디오 스타>는 이 시대의 패자들의 이야기이다. 한물간 ‘스타’와 그를 20년 동안 ‘얼굴에 똥칠해가며’ 뒷바라지해온 매니저의 이야기. 잠깐 화려했지만 서서히 또는 갑자기(영화는 그들이 몰락해온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몰락한 두 40대 남자의 이야기. 쉽게 둘 중 하나의 경우를 떠오르게 만드는 기본 얼개이다. 지난하고 팍팍한 삶의 무게를 냉철하고 깊이있게 담아내거나, 구질구질한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막판에 값싼 감동을 강요하거나. ‘죽거나 또는 나쁘거나(가벼운 마음으로 명절 극장가를 찾은 관객에게 ‘죽음’이 되거나 아니면 그들의 정서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그런데 이 감독-작가 콤비는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제3의 길을 찾아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라디오 스타>가 주는 감동(웃음과 울음)은 훈훈하다. 그들이 찾아낸 이 제3의 길, 그리고 그 속의 훈훈함에는 콤비의 미덕과 장점 그리고 한계와 단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라디오 스타>

<라디오 스타>가 전해주는 ‘훈훈한’ 감동의 일등공신은 ‘라디오’이다. 이 영화에서 ‘라디오’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신파조 정서를 중화시키는 매개물이고,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자아내는 영리한 장치 또는 제3의 인물이다(안시환의 지적처럼(<씨네21> 571호) 이준익-최석환 콤비는 ‘대중문화-놀이’를 효과적인 서사 전개의 장치로 즐겨 이용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 중 하나는, 영화의 첫 번째 감동 포인트, 즉 청록다방 김양의 ‘방송 사고’ 장면이다. 스튜디오 안으로 자장면과 커피를 배달시키고 배달온 그들을 마이크 앞에 앉히기도 하는 최곤, 그런 깽판에 가까운 행동에 천연덕스럽게 호흡을 맞춰주는 그들. 그 모습은 우리를 충분히 웃게 만든다. 그러나 김양의 슬픈 사연이 ‘방송’되는 순간, 영화는 우리를 울게 만든다. 웃음에서 눈물로의 미묘한 전이 또는 공존. 그런데 그 웃으면서 울게 만드는 감동스러움은, 단지 그녀의 사연이 슬프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장면은 스튜디오 안에서 슬픈 사연을 늘어놓는 김양의 모습과 스튜디오 밖에서 그녀의 사연을 듣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이 정교하게 교차편집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순간 우리는 그녀의 슬픈 사연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사연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 담긴 동정과 연민에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새롭게 형성되는 연대(連帶)와 그것을 통해 가능해지는 극적 반전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녀의 사연을 듣는 다양한 영월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방송 사고가 역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껏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이었던 지국장과 강 PD를 그 공감의 연대망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극적인 승리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 순간의 감동은 그것이 패자들(최곤-영월지국)의 극적인 부활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극적인 순간의 한가운데에는 ‘라디오’라는 매개(또는 매체)가 있다.

라디오, 두 남자의 신파적 정서를 중화하는 매개물

영화를 두번 보았을 때 전혀 다른 영화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라디오 스타>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 것은, 잘 다듬어진 멜로드라마적인 만듦새였다. <라디오 스타>는 감독의 두 전작인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은 이야기였고, 그 작은 이야기를 다루어가는 감독의 연출 솜씨는 그것들보다 세련되고 밀도 있었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감독-작가의 연출 솜씨는 그 자체로 새로운 진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또한 전형적인 장르적인 기교 또는 수사법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두 번째 보고나서, 이 영화에 단순히 잘 다듬어진 만듦새 이상의 것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매니저 박민수의 이야기로서의 <라디오 스타>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이다. 그가 전형적인 신파 멜로드라마의 ‘여성’ 캐릭터에 가깝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철없는 최곤-남편이 저지른 말썽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고, 또 안에서는 담배 시중에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주어야 하는 한없이 헌신적인 아내. 그리고 정작 그 남편에게 재기의 기회가 왔을 때는 자신이 ‘걸림돌’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닫고 ‘알아서’ 물러나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 게다가 그는 그 헌신적인 아내 노릇 덕에 자신의 가정에서는 ‘가장’의 자리를 잃기도 했다(딸이 그린 그림에 그의 자리는 없다). 이 영화가 그들의 끈끈한 우정을 통해 훈훈한 감동과 희망을 느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리한 사기에 불과할 것이다. <라디오 스타>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멜로드라마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최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곤의 이야기로 보면, <라디오 스타>는 철없던 한 남자의 때늦은 어른-되기에 대한 영화이다. 최곤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붙잡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박민수에 대한 우정과 의리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제 더이상 진정한 ‘재기’의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실 그는 한때 ‘스타’였지만 결코 진정한 ‘가수’(특히 로커)이지는 않았던 그런 인물이다(영화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한번도 제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방송 중 강 PD의 음악적 소양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록의 정신과 밴드 정신 운운하는 장면은, 뜬금없고 웃길 뿐이다). 그는 100회 기념 공개 방송의 무대에 서지 않았던 이유를 “다시 노래하고 싶어질까봐”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다시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그는 ‘무대’에서 부르기를 거부했던 그 노래를, 스튜디오에서 신청받았을 때는 굳이 직접 부른다. 그는 그토록 바라던 기회가 왔을 때 그가 욕망하는 것이 ‘허상’임을, ‘스타’는 공장(starfactory)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의 깨달음을 위해서, 박민수의 헌신과 영월 사람들의 순박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매개하는 무대인 ‘라디오’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이제 그는 ‘스타’가 아니라 DJ로서 또는 작은 무대에서나마 계속 노래를 부르는 진정한 가수로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현실과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박민수가 돌아온 진짜 이유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박민수에게 ‘돌아가라’고 말하는 아내 순영의 표정은 기쁨이 아니라 체념이었다). 느닷없이 스톱모션으로 끝나는 마지막 엔딩신(사실 그 갑작스러운 스톱모션은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단호한 미완’의 서사에는 철없이 품는 희망도 칭얼대는 절망의 몸짓도 없다. 단지 그저 그렇게 훈훈할 뿐이다.

수사적 장치에 머문 ‘놀이-예술’

<라디오 스타>는 이 감독-작가 커플의 장인적인 숙련도의 향상과 성숙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커플의 고유한 한계와 ‘징후적’인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음악은 록(특히 한국의 ‘정통 록’)이다. 그리고 ‘이스트 리버’를 통해 희화화된 형식으로나마 저항 정신으로서의 록 정신을 이야기하고, 최곤의 입을 통해 진정한 음악으로서의 밴드 음악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수사적 효과를 위해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그 음악들은 때로는 아이러니한 웃음과 비애의 장치로(영월 주민들로 하여금 라디오를 끄게 만드는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 재기의 마지막 기회가 온 듯했지만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 내보내게 되는 버글즈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때로는 뮤직비디오적인 정서 강화의 코드로(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이용된다. 그것이 단순한 수사적 장치들로 머무는 것은, 무엇보다 최곤이 퇴물이 된 ‘스타’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가수 또는 로커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장치 놀이-예술의 형식을 효과적인 수사적 장치로 차용하지만 정작 그 놀이꾼-예술가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나 탐색은 비껴가는 이러한 방식과 태도는 <라디오 스타>가 전작들과 공유하고 있는 징후적인 현상이다(허문영(<씨네21> 537호), 안시환 등의 평자들도 이 점을 지적하고 아쉬움을 드러낸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영월 또는 영월 사람들은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고 인물들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곳을 훑고 지나갈 뿐, 그들의 삶의 심층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특히 영월 사람들은 이 ‘놀이판’에서 ‘놀이의 주체’라기보다는 ‘놀이의 객체’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이 지역 ‘사랑방’이 됨으로써 부활에 성공한다는 기본 설정은 있지만, 그곳에서 전해지는 사연의 대부분은 서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 거리에서 발견된 것들이 아니다. 그 프로에서는 그들이 사연과 함께 신청했을 그들이 듣고 싶어했던 노래가 방송되는 경우가 드물다. 진정한 지역의 놀이판이 될 수도 있었을 100회 기념 공개 방송의 무대-마당은 어딘지 모르게 맥빠지고 썰렁하기만 하다. 이런 점들이 일보 후퇴의 퇴행적 징후로 보이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어쨌든 두 전작들 못지않은 또는 그보다 더 커진 그 놀이판에서 그들의 신명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것, 이것이 <라디오 스타>가 남긴 가장 큰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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