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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보이는 구원의 빛, <더 차일드>

EBS 10월14일(토) 밤 11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고 어려운 질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혹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가? 이것은 왜 영화를 만들고 보는지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질문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질문에 대한 뚜렷한 답을 갖고 있는 자는 거의 없으며 그것은 심지어 불가능해 보인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장 뤽 다르덴이 돋보이는 이유는 이들이 적어도 그 질문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의 과정은 영화가 서 있는 자본주의적 토대뿐만 아니라 감독 자신들의 뿌리까지 되돌아보게 종용하므로 감독들은 물론, 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안긴다. 그 고통이 영화라는 미학을 윤리로 나아가게 한다.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약속> <로제타> <아들>과 마찬가지로 극단적 상황에 이미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따라간다. 여전히 효과음을 최대한 배제하고 핸드헬드를 통해 드라마틱한 대사나 행동으로는 좀처럼 알 길이 없는 인물들의 심리 혹은 상황의 절박성을 담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극단의 상황에 던져진 인물들이 마침내 어떤 선택을 시작한 순간 카메라를 거둔다. 용서와 화해와 약속의 순간들. 하지만 그 순간들이 거창한 희망을 말하거나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사회의 모순을 덮어준다고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해피엔딩과는 다른 구원의 순간이다. 그 구원은 초월적인 외적 존재로부터 오지 않는다.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자신의 못난 상을 비춘 순간, 부끄러움, 두려움, 아픔, 무기력함 앞에서 구원의 빛이 단지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다.

<더 차일드>의 브뤼노는 <약속>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소년 이고르,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했다. 카메라는 줄곧 제레미 레니에의 시선과 표정 혹은 뒷모습만을 한참 비춘 뒤, 그가 보고 있는 대상, 그가 잡고 있는 무언가, 그가 선택한 상황을 뒤늦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프레임 안에서 그 밖을 상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 시간의 간극을 견디는 일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힘겹지만, 다르덴 형제가 원하는 것은 그 시간을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일이다. 브뤼노가 빈 유모차와 빈 오토바이를 처절하게, 그러나 끝까지 끌고가듯, 다르덴 형제 역시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는 대신, 영화의 끝까지 가야 한다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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