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만 잘 건너뛰면 정말 긴 연휴다. 만약 이 긴 연휴가 사막 위의 오아시스처럼 반갑게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이 글은 무용하다. 이 글은 온갖 잡일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시들어버린 ‘추석 노동자’, 누구는 해외로 떠나는데 고향조차 내려갈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 그리고 가족도 애인도 없이 추석 기분 낸답시고 홀로 전 부치고 앉아 있는 고독한 인간, 오직 이들을 위한 것이다. 청명한 가을, 남들 놀러갈 때, 어둠침침한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이나 껴안고 있다고 자학하지 말자. 텔레비전, 맥주, 그리고 이미 본 영화라도 처음 보듯 즐길 수 있는 자세만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아무리 <두사부일체>나 <몽정기>처럼 재탕, 삼탕, 백탕 된 영화들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당신의 감수성을 무시하더라도, 텔레비전을 끄지 말고 차라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온갖 꼬투리를 잡아 신나게 저주를 퍼붓자. 다행히 올해는 비교적 싱싱한 최근작들과 몇번을 봐도 나름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작품들이 꽤 많이 준비되어 있다.
긴 연휴, 무기력해진 몸을 다스리는 데 고상한 요가보다 좋은 것이 있다. 아무 생각없이 현란한 몸의 향연에 마음을 맡기는 것. 성룡은 조금 지겹고 할리우드 액션은 짜증날 때, 주성치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우선 <쿵푸허슬>은 대단히 웃긴다. 주성치의 소심하지만 아름답고 노련한 액션은 물론이고 이름부터 황당한 돼지촌 곳곳의 에피소드들과 <희극지왕> <소림축구> 등 주성치 영화에 출연했던 일명 ‘성치 패밀리’들의 아우라가 당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것이다. 주성치 혼자 각본, 연출, 제작, 주연까지 도맡은 작품으로 주성치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해볼 기회다. 만약 완벽한 고수들에게 기가 죽는다면, 고수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터지는 <싸움의 기술>의 어눌한 소년에게 연민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마음 여리고 육체 부실한 소년에게 세상은 가차없이 모질다. 그러나 독기와 증오심만으로 싸움의 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차피 액션은 주성치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게 뻔하니, 차라리 ‘고수는 싸움의 기술만 터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인생 고수, 백윤식 선생의 카리스마에 주목할 일이다.
닭살없는 연애의 밑바닥, <연애의 목적>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마음에 부채질하냐고? 걱정 마시라. 이 두 영화에는 눈물 짜는 신파나 낭만적인 시선이 없다. <연애의 목적>에서 연애 뒤에 남는 건 사랑의 추억이 아니라 뻔뻔함(박해일)과 상처(강혜정)뿐이다. 사랑을 할 때는 한없이 불안하고 이별을 할 때는 구질구질해지는 것이 인간의 연애라고 영화가 한수 가르친다. 낯간지러운 사랑의 약속 따위는 없다. 한재림은 이 냉혹한 진실을 신인답지 않은 대범함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밀어붙인다. 그래도 강혜정과 박해일의 이상한 해피앤딩에 못내 기분이 상한다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유지태와 김태우, 성현아에게로 고개를 돌려보자.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희생과 순수 대신 위선과 가식과 나르시시즘과 거짓말로 둘러싸인다. 그 사랑은 지겹게도 반복된다. 연애의 밑바닥이 날것 그대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조롱하지만, 그 조롱은 화살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홍상수식 연애는 낄낄거림을 동반한 고통이다. 하지만 그의 연애 방식이 아무리 괴롭게 다가오더라도, 황정민과 전도연의 애절한 사랑을 보고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처량하게 우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 아닌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을 버려! <슈렉2>와 <곰이 되고 싶어요>
고수들의 노련한 액션도, 아무리 괴로운 사랑 이야기도 반복해서 보다보면 심장의 반응은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냉소하거나 더 강한 자극을 찾는 대신, 따뜻한 세상의 유쾌한 이야기를 찾아보자. <슈렉2>의 ‘겁나먼 왕국’은 당신을 지루함의 덫에서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허니문에서 돌아온 못난이 초록 커플은 과연 왕국의 인정을 받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당나귀 덩키뿐만 아니라 새로 등장한 프린스 차밍, 역대 만화 캐릭터 사상 가장 귀엽게 느끼한 장화 신은 고양이까지 감초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스파이더 맨> <반지의 제왕> <귀여운 여인> 등의 화제작을 패러디하는 솜씨도 여전하고 톰 웨이츠, 닉 케이브,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이 부른 맛있는 노래는 이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놀랄 만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슈렉2>의 재기발랄함보다 감동적인 동화의 깊이를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덴마크의 거장 야니크 하스트럽의 <곰이 되고 싶어요>가 어울린다. 이 애니메이션은 북극의 그린랜드를 배경으로 곰과 인간이 빚어내는 가슴 훈훈한 드라마다. 어린 시절 어미 곰에게서 자라 결국 인간 세상으로 보내어지나 다시 곰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의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곰만 보아온 우리에게 곰의 세계를 열망하며 눈물 흘리는 인간은 심금을 울린다. 만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거라는 쓸데없는 오만과 편견을 저 멀리 날려주는 작품이다.
블록버스터를 저렴하게 즐기는 법, <캐리비안의 해적>과 <스타워즈> 시리즈
말이 필요없다. 굳이 줄거리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연휴에 보는 블록버스터영화는 극장에서 먹는 팝콘 같은 존재다. 연휴 대박을 노리고 개봉한 얄미운 블록버스터들이 아니라 몇년 전에 이미 극장에서 한번 본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다시 한번 봐주는 것. 비디오로 빌려 다시 보기는 어색하고 시리즈인 탓에 DVD를 하나씩 사기가 어쩐지 망설여지는 블록버스터들을 이럴 때 부담없이 구경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이 선사한 기회다. 더욱이 <반지의 제왕> 같은 단골메뉴에 지쳐갈 때쯤, 상대적으로 싱싱하게 느껴지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스타워즈> 시리즈는 반갑다. 가난한 마음을, 돈을 마음껏 바른 화려한 세트로 달래주고 눈이라도 호강시켜주는 건 어떨까. <캐리비안의 해적>의 영원한 마스카라 맨, 조니 뎁의 매력에 푹 빠져 보물을 찾아 환상의 세계로 떠나거나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를 떠올리며, 4, 5, 6편인 <새로운 희망> <제국의 역습> <제다이의 귀환>을 한번에 복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검은 한복과 물방울 원피스의 미장센, <음란서생>과 <친절한 금자씨>
이 두 영화를 하나로 묶은 이유는 순전히 시각적인 측면에 근거한다. 어차피 한번쯤은 봤던 영화를 다시 볼 때, 그것도 연휴에 늘어지게 앉아 다시 관람할 때는 영화의 특정 부분에만 초점을 두며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카메라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쫓아가보든지 배우들의 연기력에 주목해보든지 영화의 음악이나 음향효과에 촉각을 세우든지 빛의 미세한 움직임을 찾아내보든지 선택은 보는 자의 몫이다. 탁월한 선택과 그 선택을 밀고 가는 끈기,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이 영화를 보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음란서생>과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주목할 요소들은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화들의 세트와 주연 여배우의 의상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 내내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한석규와 이범수가 즐겨 찾는 오달수의 유기전 내부나 저잣거리 풍경은 고증에 따라 재현했다고 하지만 근대적인 분위기가 스며들어 독특한 영화적 공간으로 완성된다. 이영애가 출옥 뒤 거주하게 되는 좁은 공간도 강렬한 색채 대비 속에서 키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특히 이 두 영화에서 시각적 쾌감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아름다운 의상들이다. 김민정이 입은 그 유명한 검은 한복이나 이영애의 촌스러운 물방울 원피스는 미장센의 일부가 될 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표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이러한 효과는 ‘그녀들’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