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내디딘 큰 한 걸음
<내가 살던 키부츠> Sweet Mud 드로 샤울/ 2006년/ 이스라엘, 독일, 일본, 프랑스/ 100분/ 월드시네마
열세살은 십대가 시작되는 나이다. 어린아이처럼 무책임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지만,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엔 너무 적은 나이. <내가 살던 키부츠>는 그 열세살을 통과하며 살 속 깊숙이 파고든 상처를 가지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다. 키부츠에 살고 있는 드비르는 일년 뒤에 성인식을 치르는 열세살 소년이다.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그의 엄마 미리는 몇년 전에 해변에서 만났던 스위스 남자 슈테판과 편지로 연애를 하다가 그를 키부츠로 초청한다. 슈테판이 나이가 많은 데 실망했던 드비르는 자상한 마음 씀씀이와 연을 만드는 실력, 엄마를 아껴주는 애정에 감복해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되지만, 슈테판은 드비르를 못살게 구는 이웃 남자의 팔을 비틀었다가 키부츠에서 쫓겨나고 만다. 유일한 희망을 놓친 미리는 몇년 전에 그랬듯이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점점 무너져간다.
<내가 살던 키부츠>가 묘사하는 키부츠는 공동체의 이상을 담요처럼 두른 채 완고하게 웅크리고 있는 괴물과도 같다. 그 담요 아래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젊은이는 목숨을 끊고, 타락한 지도자는 외로운 여인의 육체를 착취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짐을 꾸린다. 어른을 대신하여 결단을 내려주어야 하는 아이들, 울음을 참으며 길을 떠나는 아이들. <내가 살던 키부츠>는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파닥거리는 어른들로부터 엄마를 지키고자 차가운 비를 맞으며 밤을 새워야 하는 아이를 아파해주는 영화다. 드비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하나씩 먹으라”고 아버지가 주었다는 친구의 사탕을 받아 오독오독 깨물어먹는 모습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여우비> Rain Dogs 호유항/ 2006년/ 말레이시아/ 94분/ 아시아영화의 창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말레이시아의 19살 소년은 어떻게 인생을 알아가는가. 고향과 대도시를 오가며 그는 어떤 경험을 겪고 어떻게 성숙해가는가. <여우비>는 죽음, 폭력, 살인 등 극악한 세계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퉁의 이야기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낸다. 어머니와 둘이 시골에서 살고 있는 퉁은 형 홍을 만나러 콸라룸푸르를 찾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퉁은 슬픔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형의 유품인 오토바이를 가져갔음을 알고 어머니와 다툰다. 퉁은 이모 집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이모네 식구들과 일상을 공유하고, 추이와 후이 자매도 알게 된다. 장편극영화 데뷔작 <민>(2003)으로 낭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안식처>(2004)로 9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과 2005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특별언급상을 수상한 호유항 감독은 <여우비>를 안정적 연출과 촬영, 그리고 음악이 조화를 이룬 영화로 만들었다. 2004 PPP 프로젝트 선정작.
<나의 유령친구> Dorm 송요스 수그마카난/ 2005년/ 타이/ 111분/ 아시아영화의 창
열두살의 차트리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홀로 겉돌며 TV속 세상에 빠져 있는 소년. 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주장으로 기숙학교로 전학가게 된 차트리는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준 비쉬엔과 단짝이 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밤마다 기묘한 사건이 발생하고, 자살한 아이의 원혼이 학교를 떠돌고 있다는 괴담이 퍼져나간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차트리는 괴담의 진실을 추적해나가고, 친구 비쉬엔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모험을 감행한다. 음산한 기숙사, 으스스한 화장실, 출입이 금지된 낡은 수영장 등, <나의 유령친구>는 학교 괴담의 전형적인 모양새를 갖추면서도, 그것을 발판 삼아 더 큰 드라마로 나아간다. 괴담은 학교라는 공간과 구성원들의 사연이 촘촘히 얽힌 이야기로 변주되고,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유령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가던 차트리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게 된다. 탄탄하게 조직된 공포영화의 틀에 소년의 성장담을 녹여낸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
<일루전> Illusion 엘렌 라모스, 파올로 비야루나/ 2005년/ 필리핀/ 116분/ 아시아영화의 창
한 청년이 성적 환상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찾는 이야기. 1958년의 마닐라. 청년 미겔은 화가인 아버지를 만나러 마닐라에 왔지만 아버지는 요양을 떠나버리고 집에 없다. 아버지의 빈집을 지키며 페인트공으로 일자리를 구한 그의 앞에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 스텔라가 나타난다. 모델을 하기 위해 미겔의 아버지를 찾아온 그녀에게 미겔은 자신이 화가 파블로라고 거짓말을 하고, 누드모델인 그녀를 앞에 두고 연심을 품는다. 미겔은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라고 격려해도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데 만족하다가, 스텔라를 위해 그림에 매달리게 된다. <일루전>은 화사한 복고적 화면과 아스라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음악으로 가득한 영화다. 미겔이 고향에서 키우던 소와 대화하는 꿈을 꾸는 장면에는 유머가 살아 있고, 미겔이 스텔라를 생각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뮤지컬 대목들은 낭만적이다. 공동감독인 엘렌 라모와 파올로 비야루나는 신파적 연애담을 재치있게 복고적으로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