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산업이 아니고 문화다. 반론의 여지없이 당연한 명제라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봉 첫주 관객의 인정이 한 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가혹한 시장 논리다.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네편으로 늘어나는 사이에 서울시네마테크는 5주년을 맞이했다. 관객의 영화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시네마테크는 물론이고 지방의 예술영화 전용관은 여전히 운영난에 허덕인다. 결론은 간단하다. 영화를 다시 문화의 영역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 서울아트시네마가 이를 위한 좌담을 제안했고, 지난 9월19일, 영화언론, 영화운동, 영화정책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이 이에 응했다. 다음은 4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참가자들의 토론을 바탕으로, 각각의 발언을 정리한 요약본이다.
“관객을 배려한 정책 고민해야”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최근 멀티플렉스 규제법안과 관련된 논의를 비롯하여 영화문화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좌담은 영화 제작과 배급 등 영화공급자 중심이 아닌 관객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을 고찰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문화로서의 영화를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과거에는 문화적 예외가 영화 지원의 이유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은 문화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양성이라는 말을 치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스위스의 경우는 “지역의 규모나 상영관 수를 고려할 때 충분한 편수의 영화가 여러 국가로부터 수입되어,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라는 말로 영화 공급의 다양성을 정의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역, 상영관 수, 평수, 수입국가, 장르, 스타일 등까지 고려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각종 지원 정책의 규모와 방향이 결정되어야 한다. 사실 한국은 영화 소비자의 위치를 공급자나 비평자에 비해 가장 낮게 평가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다. 지원 정책 역시 공급자가 아닌 관객을 배려한 정책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는 게 아닌가 싶다.
“보통사람의 문화로 만들어야”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 영화를 두번 이상 보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를 직접 만드는 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정도를 설명하는 말은 관객을 창작자보다 열등한 위치에 한정시킨다. 90년대 생겨난 시네필 문화는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영화를 문화로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 많은 다양한 영화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백수밖에 없다. 시네마테크 회고전의 경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회고전을 충분히 챙겨볼 수 있도록 적어도 한달 동안 오후 4, 5시부터 영화를 상영해야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러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영화 보는 사람들은 점점 초조해진다. 평론가와 저널은 지금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평생 볼 수 없다는 식의 분위기를 조장한다. 비평은 우리에게 금지된 것, 저 바깥에 있는 영화의 매력을 강조했지만 이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영화든 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무엇인가에 대해 침묵하면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도 당시 언론의 문제였다. 영화가 문화가 되려면 언제든지 찾아보고 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영화제 상영작 아카이브 구축하자”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지금 상황에서는 독립영화 전용관을 만들어도 게토화될 가능성이 크다. 일년에 1만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을 위해 몇억원씩의 돈이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런 일을 국민들의 세금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산업이 아닌 문화로서 영화가 지닌 가치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무조건적인 강요도 문제다. 광주영화제 때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을 단체관람시켜놓고는 학생들이 빠져나갈까봐 극장문을 잠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매를 맞지, 저런 지겨운 영화는 못 보겠다고 학생들이 게시판에 항의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더라. (웃음) 전 국민이 독립영화를 봐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번주에 <마파도> <괴물>을 상영하는 극장이 다음주에는 <송환> <얼굴없는 것들>도 상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벤트가 되어버린 영화제도 문제다. 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처럼 지역에서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해도 판권이며 프린트, 자막 비용 때문에 영화 한편당 1천만원 이상의 돈이 필요해서 엄두도 못낸다. 많은 국고를 지원받은 영화제를 중심으로 그해 상영한 영화 중 1년에 두편이라도 의무적으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이를 공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 어떨까.
“멀티플렉스에 사회적 역할을 부과”
목수정/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지난 10년간 지자체가 개최하는 축제가 서너배 가까이 늘었다. 남발되는 지역축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례가 필요한 실정이다. 하지만 지자체가 다양성과 공공성을 위한 조례를 스스로 만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상위법으로 이를 강제해야 하고 그것은 문화관광부가 할 일이다. 우리나라는 문광부 스스로 산업자원부의 문화섹션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민 레저 활동 중에서 문화활동으로 칠 만한 것은 7위에 오른 영화감상밖에 없다. 나머지는 TV, 게임, 수다 등이다. 가장 익숙한 문화장르부터 경제효과를 따지지 않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기적인 복지정책처럼 문화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한 멀티플렉스 안에서 한 영화가 70%에 달하는 관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늘날 CGV와 하이퍼텍 나다의 차이는 과거 대한극장과 동숭씨네마텍과의 차이에 비해 훨씬 크다. 최근 민노당에서 준비 중인 영화진흥법 개정안은 8개관 이상의 멀티플렉스 안에서 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30%로 한정하고, 의무적으로 제한상영관을 설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규제가 아닌, 멀티플렉스에 사회적 역할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지역 공공상영관 가능성 있다”
김보연/ 영화진흥위원회 국내진흥팀
관객을 다양성 영화로 유인하는 것이 중요하고, 멀티플렉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현재 CGV에서 인디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 등은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영진위가 수용자 입장에서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전용관이다. 현재 예술영화 전용관이 21개관이다. 문제는 여기서 상영하는 영화들, 즉 거점극장의 라이브러리를 확보하고, 그 콘텐츠가 전용관을 타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건물을 짓고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함께 운영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 서울을 비롯한 6대 도시를 제외한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전국에 49개의 문화생활 권역단위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원주, 수원, 용인, 평택 등은 향후 예술영화관이 생길 수 있는 지역으로 집중 공략할 예정이다. 예전의 시네필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해 대학로까지 찾아왔지만, 요즘 일산 주민은 일산 롯데시네마 상영작 위주로 영화를 보지 하이퍼텍 나다까지 찾아오지 않는다. 아트플러스가 올해로 4년차에 접어들었는데 올해 들어 지방 상영관의 관객 수가 획기적으로 늘었다. 지역 공공상영관 역시 가능성이 있다.
“양을 늘리기보다는 질적인 지원책 모색할 때”
남동철/ <씨네21> 편집장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각종 지원이 많아지면서 좀더 많은 저예산영화들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편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관객과의 접점을 찾는 데 실패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다. 만들어진 영화를 어떻게 관객에게 소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공공상영관을 전국적으로 건설하는 것도 좋겠지만 다양성을 위한 정책을 너무 양적으로만 접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정작 만들어놓은 극장의 관객은 줄고, 극장에서 거는 영화가 호응도 별로 못 얻는 상황이다. 너무 먼 미래의 큰 이야기가 아니라 당면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차피 예산은 한정된 것이다. 질적인 접근의 예를 들자면 영진위에서 제공할 수 있는 한정된 지원액수를 기존에 10군데에 나눠줬다면 이것을 다섯 군데에 나눠주고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식이 가능할 것이다. 극장 역시 신규로 극장을 만들기 전에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전용관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이다.
“기존 전용관의 자생성을 키워줘야”
김수정/ 서울아트시네마 사무국장
비교적 많은 국고를 지원받는 국제영화제에 권고사항을 둘 수는 없을까. 상영회를 위해 영화제쪽에 자막번역본 교류를 요구하면 돈을 주고 사라고 하는 실정이다. 공공의 지원을 받았으므로 그 부산물은 다시 돌려준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사실 기존 거점도 탄탄하지 않고, 활력을 갖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전용관이 자생성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지 객관적으로 추산해볼 필요가 있다. 신규는 그 이후의 일이다. 서울아트시네마조차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더이상의 관객 견인이 힘들다. 외국의 경우 시네마테크 운영에서 관객 입장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30%밖에 안 된다고 들었지만, 우리는 관객에 대한 비용의존이 너무 심하다. 서울아트시네마가 4년이 됐는데 점점 미지의 작가를 소개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관객이 더 줄게 되고, 어느 정도는 시장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2, 3년이 지나면 시네마테크는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상영뿐 아니라 라이브러리를 위한 공간 확보가 중요한데 당장 내년 3월에 계약이 끝나면 갈 곳이 없다. 가장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프로그래밍에만 전력을 기울일 듯한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세워질 곳은 어떻게 운영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