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은 첫번째 문단을 읽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엔딩이다. 어머니는 딸을 배웅하고 문을 걸어 닫는다. 이상하지만 여기는 그 어머니의 집도 아니고 딸의 집도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기 남는다. 미끄러지듯 어두운 복도를 걸어 카메라에서 멀어진 뒤에 왼편으로 돌아서 이층으로 막 올라서려 한다. 영화는 그때 끝난다. <귀향>의 이 마지막 장면에는 수사도 없고 방점도 없다. 어머니는 내 딸이 아닌 남의 딸의 병든 몸을 돌보기 위해 지금 남의 집 이층을 오르려는 참이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맺어야 할 곳에서 맺지 않은 채 설명해야 할 것을 다 말하지 않고 끝나는 중이다. 심지어 어머니가 지금 돌보려는 그 딸은 원수 같은 여자가 낳은 자식이다. 영화 속에서 라만차의 사람들은 말한다. 생전에 하지 못하고 남겨둔 일이 있을 때에 유령은 돌아오는 것이라고. <귀향>은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 어머니가 별안간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발단이 된 영화이므로 어머니는 정말 유령일 수도 있다(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알모도바르는 여기에 대한 근거라 할 만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유령이라면, 그녀가 죽음의 강을 건너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원수의 딸을 돌보는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이 계단 앞에 선 어머니 혹은 어머니 유령의 모습을 엔딩으로 선택함으로써, 그녀의 ‘회귀’에 관련한 모든 과거의 진실과 풍문을 빈칸으로 만든 뒤, 어떤 숭고한 보살핌의 행위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만을 남겨둔다.
오래전에 부모를 잃고 고향 라만차를 떠나 마드리드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자매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와 쏠레(롤라 두에냐스). 언니 라이문다는 힘겹게 잡일을 하며 놈팡이 같은 남편과 어린 딸 파울라를 부양하며 산다. 동생 쏠레는 2년 전 남편이 집을 나가버린 뒤 홀로 무허가 미용실을 운영하며 산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라이문다는 딸을 성추행하려던 남편이 딸의 손에 죽어 있는 걸 본다. 때맞춰 동생 쏠레에게서 전화가 온다. 라만차에 살던 이모가 죽었으니 장례식에 가자고 한다. 라이문다는 핑계를 대서 남게 되고, 동생 쏠레만 간다. 장례식장에서 쏠레는 죽은 어머니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고향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는다. 그러고 나서,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쏠레는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실제로 어머니(카르멘 마우라)의 음성을 듣는다. 실제 산 사람처럼 트렁크에서 나온 어머니는 이때부터 쏠레와 같이 지내며 살아간다. 영화는 이후부터 어머니가 무엇을 위해 돌아온 것인지 보여준다.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가 “여자들간에 존재하는 연대의식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죽음과 맺고 있는 전혀 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매우 자연스러운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그 말은 알모도바르가 경험한 이야기라기보다, 한때 그가 살았던 땅 라만차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이해하는 편이 맞다. 라만차가 고향인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을 위해 실제 그의 두명의 누나를 불러들여 고향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던 여자들의 이야기와 유령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영감을 얻었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여성과 모성의 세계는 원천적인 것이다. 남성과 부권의 세계가 종종 허약한 것이거나 여성들의 세계 안으로 유입되고 싶어하는 가면의 욕망인 것에 반해, 그들의 세계는 항상 불안한 토대 위에서도 결과적으로는 꿋꿋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충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말대로 <귀향>은 여성과 모성의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그려낸 영화다. 때문에 ‘여성들의 연대’라는 첫 번째 화두가 매력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향>의 매력은 그 여성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 방식에 있다. 그것은 두 번째 화두인 죽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알모도바르는 멜로드라마와 미스터리 구조를 꾸준하게 사용한다. 멜로드라마가 여성들의 세계를 주제화 하는 것이라면, 미스터리 구조는 그 주제를 흥미롭게 하는 빈칸의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귀향>에서 알모도바르는 미스터리한 서사에 주술을 건다. 그것이 멜로드라마 장르의 거대한 숭고함을 끌어낸다. 그 주술은 죽음을 상대로 한 것이며, 죽었다고 생각되는 어머니를 귀환시키는 것이다. 혹은 그녀의 귀환을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귀향>에서 미스터리는 어머니의 존재 그 자체다. 알모도바르는 죽음에 대해 조롱이나 안간힘으로 맞서는 대신 능청스러운 서사를 통해, 그의 표현을 빌면 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통해, 유령이 산 자의 세계를 방문하게 한다. 원천적인 모성의 힘과 여성의 연대는 그 유령의 출몰로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알모도바르가 <귀향>에서 성공하는 것은 유령이 산 자들과 함께 있다고 믿게 하는 영화적 주술에 있다. 그건 무속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영매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알모도바르는 라만차식 무속의 영화 <귀향>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영화적 영매가 되기를 자임하였다. <귀향>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영화적인 완성도로 볼 때 <귀향>은 알모도바르가 지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알리는 영화다. 똑 떨어지는 상상력, 이른바 신경증적 미학의 80년대를 지나 만들어진 90년대와 2000년대 그의 다른 영화들의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이힐>과 <비밀의 화원>의 충격을 지나, <라이브 플래쉬>의 완성을 지나,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그녀에게>의 정점을 지나, <나쁜 교육>에서 했던 반복을 한번 더 반복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십여년간에 만들어낸 여타 작품보다 주제적으로나 영화적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9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알모도바르의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력은 이번에 모성의 유령을 귀환시키는 방법으로 매력을 선사한다. 원수의 딸까지 사랑할 수 있는 거대한 모성의 힘은 그렇게 알모도바르가 불러들인 유령의 현존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