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컬렉션>은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출시 중인 ‘1980·90년대 한국영화 시리즈’의 첫 결실이다. 임권택의 87번째 작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부터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를 거쳐 97번째 작품 <춘향뎐>까지를 담은 박스 세트(그 사이 작품인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별도 박스 세트로 출시되며, <창>은 감독의 청에 의해, <개벽>은 제작사가 달라 빠진 경우다)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0년을 전후해 한국영화와 산업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으나 임권택 영화는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우른 그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당시 한국영화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박스 세트에서 임권택이 직접 음성해설을 맡았다는 것이 그 의미를 단적으로 말해주는데(평소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다는 그다), <서편제>의 조감독이었던 김홍준과 진행한 음성해설도 좋지만, 백미는 나머지 작품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진행한 것이다. 이 음성해설은 이미 두권의 책으로 나온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의 연장선상에서 정성일의 임권택 영화에 대한 투철한 연구를 계속한다. 영화로 구도의 길을 걸어온 작가와 그의 영화에 경도된 평론가가 나누는 진지한 대화를 보통의 음성해설과 비교하면 곤란하다. 정성일의 날렵함과 임권택의 느림이 간혹 어긋나기는 해도 서로를 붙잡고 깨우치는 과정이 선문답과 같아서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쉽다. 말년의 존 포드는 병문안을 간 하워드 혹스와 피터 보그다노비치를 보고 “혹스, 저 애가 당신도 그렇게 괴롭히던가요?”라고 말했다 한다. 음성해설이 모자랄까봐 따로 1시간 넘는 인터뷰를 행한 임권택과 정성일을 보다 그 일화가 생각나 빙그레 미소짓는다. HD 리마스터링을 마친 영상이 작품의 가치를 지키는 가운데, 기타 부록으로 간략하나마 제작현장과 영화제 참가를 기념한 몇개의 영상, 사진 자료 등을 수록했다. 박스 앞면에 ‘감독의 인정’을 자랑하는 스티커가 그냥 붙은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