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비롯해서 한국 학교 시절을 묘사하는 영화들을 보면 한국 학교가 정말 이렇게 폭력적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은 학교는 영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폭력이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즉 몸과 마음을 나라를 위해 바쳐야만 하는 강제는 학생이든 교사이든 피하기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군대에서 복종을 배운 교사들은 가끔은 학생들이 입원할 정도로 매를 주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학교, 군대, 감옥, 공장 등은 공공(국가)의 이익을 위해 훈련을 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타율적 강제에 의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노예도덕’ 즉 언제든지 무너지기 쉬운 복종에 불과하지, 자율적 규제 즉 스스로의 이해와 동의에 의한 존경이 결코 아니다. 그 결과물은 ‘예의 바른 노예’ 혹은 자동기계(automat) 혹은 ‘자판기’(自販機)인데, 자율주체와는 멀다. 이러한 논리와 방식으로 사회화된 ‘바른 인간’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왕자가 선물로 받은 흰 말 위에 나체로 앉아 있는 ‘예쁜 노예’와 같은 상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현실은 상상을 추월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어느 한국 대기업의 작업장을 ‘원형감옥’으로 규정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이 회사는 무노조 원칙에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서 자사 노동자들을 작업장뿐 아니라 퇴근 뒤 개인 주택까지 감시하고 있다. 원형감옥은 18세기에 영국에서 완벽한 통제를 위해 발명한 것이었다. 원형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가운데에 서 있는 적은 수의 교도관이 감방에 있는 많은 수인들의 행동을 한눈에 보기 수월한 통제장치였다. 감시자는 늘 어둠 속에 있고 감방은 늘 불빛 아래 있기 때문에, 수인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수인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이 현상을 푸코는 나중에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발전으로 분석했다. 즉 보통 사람들도 일종의 수인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앞서간 것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즉 포스트포드주의의 등장으로 인해서 생긴 ‘포섭사회’이다. 즉, 인간이 생산과정 혹은 경제논리에 포섭된다는 현실이다.
필자는 가끔 <제6감>의 소년처럼 침대 밑으로 숨으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야곱의 사다리>에서처럼 길가, 지하철, 버스, 커피숍 등에서 사이보그들이 보인다. 문제는 <화성인 지구정복>에서처럼 선글라스를 껴서 지구를 침입한 외계인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즉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이 아닌, 이미 안에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있는 우리 스스로의 침입 혹은 포섭이기 때문에 훨씬 더 무섭다는 점이다. 포드주의를 반영하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처럼 단지 하나의 자동기계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 우리는 시장논리에 저절로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4>에서 빅브러더가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2006년 현재는 디카를 들고 있는 옆 사람으로서의 ‘스몰브러더’, 그리고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감시한다. 즉, 사이보그는 이미 ‘체제’와 합체된 만큼 감시자체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비판하면서 신을 일종의 보장구(保障具, prosthesis)로 설명한 것처럼 다양한 휴대단말기와 같은 보장구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할 것만 같은 사이보그들은 특히 한국에서 많이 발전된 유형이라고 하겠다. 최근에 DMB기술과 같은 발전에 따라 <스타트랙>에서 보그족에 합체된 피카드 선장이 최면상태에 빠져 있듯 작은 화면에 사로잡힌 이들이 대중교통수단과 공공장소에서 눈에 띈다. 인터넷, DMB, 게임이라는 매체의 보장구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사이족’이 되어버린 듯해 보인다.
<다크 시티> <X파일> <괴물> 등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이 글에서 문제삼으려는 사회현상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풍부한 은유를 제공한다. 하지만 은유들만 보느라고 실제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부트캠프(신병훈련소)식 학교, 원형감옥식 작업장, 실제 세계가 사라지는 듯한 사이버스페이스 등은 한 인간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잉문명인간’ 만들기의 과정단계들이다. 우리는 주인의 노예, 체제(매체)의 노예,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의 노예인 셈이다. 따라서 해방되고 싶다면 “나로부터 시작하는 평생혁명”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