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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가을 바람

한동안 반바지를 입고 다니다 아침저녁 차가운 공기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여름이 물러나고 가을 바람이 서늘하다. 에어컨에 익숙해졌던 몸은 자연이 실어온 바람에 새살이 돋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서울에서 요즘처럼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는 때는 많지 않다. 나는 가을이 걷기 좋은 계절이라 좋다. 어딘가 여행을 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냥 가까운 곳에서 산책만 하더라도 좋은 때다. 9월이나 10월에 서울 성곽길이나 삼청동, 가회동 골목 같은 곳을 걷다보면 가을이 몸에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그런 거리가 주말마다 사람들로 꽉 차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아서일 것이다.

강남에도 옛 정취가 남아 있는 동네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강북에도 그런 동네가 많지는 않다. 시대 배경이 현재가 아닌 영화를 만드는 경우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 문제지만 서울은 시간이 쌓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도시이다. 그래서 불편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어딘가 에어컨 바람을 닮았다는 느낌이다. 자연이 만드는 가을 바람과 비교하면 답답하고 불쾌하다. 물론 과거가 숨쉬는 길을 걷는다고 부가가치가 생성되거나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공간이 있으면 감각적으로 좋지만 그걸 수치로 계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마도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즐거움이기에 지켜내기도 어려웠으리라. 부동산 시세와 개발이익 같은 숫자 앞에서 옛것(수백년이 아니라 고작 몇 십년인 경우는 더욱더)의 가치란 얼마나 한가한 소리로 들리는가. 서울 시내 몇몇 옛 동네마저 개발제한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지 안 봐도 뻔하다.

<사이에서>

낡고 오래된 것을 빨리 버리거나 부숴버리려는 강박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결정적인 것은 아마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이뤄진 근대화 개발일 것이다. 전근대적인 것은 남김없이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효율이나 부가가치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은 것은 군사정권다운 과격함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 사라진 것에는 낡은 가옥만이 아니라 어떤 이념이나 가치체계도 포함된다. 대표적인 것이 민간신앙, 바로 무당이다. 이창재 감독의 <사이에서>에 등장하는 무당은 우리 전통에 뿌리내린 것이건만 외계에서 온 존재처럼 낯설다. 영화는 무당을 산 자와 죽은 자를 중재하는 존재로 그리면서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숭고함을 끌어낸다. 보다 보면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무당만이 근대의 이름으로 추방돼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측해보자면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일이 생산활동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건축물을 마구 허물어버리듯 우리의 근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니 죽은 아들딸을 무당의 힘을 빌려서라도 만나겠다는 어미의 소망 따위야 안중에 둘 리 없다.

근대적 셈법에 포함되지 않는 가치는 오래된 건물이나 토속신앙 외에도 많다. 논과 밭이 있는 시골 풍경도 농산물 수입 개방과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크고, 골목마다 자리한 구멍가게도 한-미 FTA가 이뤄지면 말끔히 정리될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미 FTA의 경제효과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경제학자들의 수치싸움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요즘엔 스크린쿼터 문제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저 자연이 만든 신선한 바람을 맞고 싶을 뿐인데, 그걸 설득하는 게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