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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93> 읽기 [2] - 미국의 자존심을 위로하는 무용담이다

사실성이 드러낸 정치성

9·11 사태 뒤 5년, 기다렸다는 듯 개시된 전쟁과 숱한 의혹들, 최근엔 자작극이었음을 주장하는 영화 <루즈 체인지>가 화제인 가운데 <플라이트 93>이 개봉되었다. 9·11의 정치적 맥락을 생략하고, 생생한 재현을 통해 공포를 체감케 하는 이 영화가 내세우는 미덕은 ‘사실성’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살아나는 건 ‘사실성’이 아닌 ‘정치성’이다. 시나리오의 근간이 된 ‘9·11 위원회보고서’가 사실성이 아닌 미 정부의 공식입장을 담보할 뿐이며, 정치적 맥락을 배제한 채 상황에 주목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동안 알려진 ‘공식적인 진실’ 외에 다른 어떤 진실도 보태지 않는다. 그러나 다큐적 기법 아래 미국의 정치적 입장과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엔 세 공간이 나온다. 첫째, 연방항공국 등 관제탑. 둘째, 비행기. 셋째, 군작전센터. 세 공간은 세 알리바이를 증명한다. 첫째, 연방항공국은 테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 그들은 뉴욕 시민이나 심지어 서울 시민에 비해 더 알지 못한다. 당시 지구촌 필부필부의 ‘어안 벙벙’ 표정을 그들이 다시 지어줌으로써 ‘미국(정부)은 전혀 몰랐습니다’를 재확인하며 미국의 피해자 이미지를 확신시킨다.

둘째, 비행기 속 장면들이 재현하듯 ①9·11 사태는 사악한 이슬람 광신도들이 무고한 미국인들에게 행한 무자비한 살육이며, ②용감한 미국 시민들은 그들과 맞장을 떠, ③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것. 조목조목 따져보자. ①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불안정한 눈빛, 승객의 목을 쑤시는 야만성, 영어도 못하고 상황대처능력 없음, 끊임없는 코란 암송 등을 통해 그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닌 광신도로 그려낸다. 9·11 사태는 미국이 취해온 중동정책의 산물이다. 그러나 미국은 9·11 직후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간의 ‘문명충돌’ 운운하더니, ‘십자군 전쟁’이란 레토릭을 구사하며 비이슬람 문명세력들로 하여금 기독교/민주주의/시장경제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전’에 참전하라 촉구해왔다(부시의 최근 발언. “이슬람 파시스트와 전쟁 중”). 충돌 직전 승객은 주기도문을, 테러리스트들은 코란을 암송한다. 영화가 구획짓는 9·11 사태의 전선을 명확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정치를 종교로 바꿔치기한 이 ‘이슬람-기독교 전선’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대테러 전쟁의 정당성은 물론 미국 내 유색인종을 탄압하는 정당성으로도 활용된다. 미국 내 670만명의 무슬림의 존재(40%는 흑인, 30%는 남아시아계, 30%만 아랍계)를 감안하면, 이 전선이 ‘내부의 적 만들기’에도 복무함을 알 수 있다. ②용감한 시민들이 저항했다는 알리바이는 ‘미국의 정신’을 재확인시킨다. “우리를 도와줄 자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도와야 합니다”라는 대사는 미국의 건국이념을 환기시킨다. 9·11 사태로 구겨진 미국인의 자존심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의 무용담이 필요하다. ③그들은 누구를 위해 대신 죽거나 국가안보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오직 살고자 발버둥치다 죽었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플라이트93법안’등을 통해) ‘시민용사’로 추대된다. 살기 위해 싸우는 데도 용기가 필요함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의 용기가 부각되는 순간, ‘살려는 의지’를 자기 희생의 의지나 순국의 의지로 둔갑시키며, 희생정신과 애국심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덧씌우는 사술이 발동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셋째, 군은 비행기를 요격하려 했지만, 하지 않았다는 것. ‘군은 뭐 하고 있었나?’에 대한 변명이자, ‘아무리 그래도 자국민을 요격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방어이다. 영화는 당위적으론 요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현실적으론 요격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마치 아쉽다는 듯 이 딜레마를 빠져나간다. 여기엔 분열이 존재한다. 무고하든 용감하든 그들은 국가안보의 당위성 앞에선 ‘죽어줘야 하는’ 존재들이다. 승객의 ‘생의 의지’와 군의 ‘요격 의지’는 충돌한다. 그러자 영화는 ‘생의 의지’를 자기 희생의 의지와 순국의 의지로 1차 치환한 다음, 국가안보를 위한 ‘요격 의지’와 봉합해버린다. 이는 각자 먹고살려는 의지를 시장참여 의지로 치환한 다음, 시장을 위한 자본의 해고의지와 봉합해버리는 신자유주의의 마술과 비슷하다. 정치적 판단을 배제한 상황재현만으로 북아일랜드 사태를 고발하겠다던 전작 <블러디 선데이>가 비폭력주의의 강박을 반복하며, 결국 IRA의 정당성을 강하게 부인하는 역설을 낳았듯이, 다큐적 재현을 표방한 <플라이트 93>은 포스트 9·11 시대의 미국의 정치적 무의식을 아예 염사(念寫)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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