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통관 구조와 절차, 각종 변수와 전문인력 미비로 영화제측이 부담 떠안아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사후 대책이 없다.”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밍팀 정지영씨의 전언이다. 시네마테크와 영화제들이 프린트 통관 문제로 고민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수입되는 영화나 아카이브의 자료 보존을 위해 구입되는 작품들과 달리, 영화제 상영 프린트는 세계영화제라는 바다를 떠다니는 유람선이다. 세관에서 관세를 물리는 항구적인 수입품이 아니라 기간 내에 상영을 마치면 재반출되는 한시적인 물건이다. 문화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와 관련된 지방자치단체들이 영화제를 위해 세관에 협조공문을 보내는 과정을 거쳐 대부분의 영화제 프린트가 국내로 반입된다. 하지만 영화제 특성상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프린트는 고스란히 일반상품처럼 관세를 추징당하는 수입품으로 돌변한다. 따라서 “시간이 생명”인 영화제에서 프린트의 수급을 결정짓는 통관 문제는 영화제 실무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다.
영화제에서 특정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해당 영화의 프린트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 소재를 찾으면 소유 기관이나 영화사가 그 영화의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프린트를 보유해도 해외에서 상영될 권리 여부도 확인해야 한다. 이때 상대 기관이나 영화사는 까다로운 요구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세계영상자료원연맹(PIAF)에 소속된 공인된 기관은 상대적으로 프린트를 용이하게 수급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아트시네마처럼 그렇지 않은 개별 단체는 과거의 성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해서 상대가 계약에 응하기 때문. 특히 고전영화일수록 프린트를 소유한 외국 기관에도 대부분 여벌의 프린트가 없기 때문에 프린트에 대한 보험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프린트의 분실이나 파손에 대한 보험인데 국내 보험사는 이를 처리해준 사례도 없고 업무 영역도 없기 때문에 영화제쪽은 매번 애를 먹는다. 상대와 영화제쪽의 업무처리가 끝나면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영화제가 영화진흥위원회에 작품 수급에 대한 신청을 하고 영진위가 이를 승인해야 한다. 해당 영화제의 상영이 기업의 상행위가 아니라 공익적인 목적이라는 것을 영진위가 심사한다. 이후 문광부에 수입추천 면제를 신청한다. 그러면 문광부는 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이 가능한 수입추천 면제와 함께 세관쪽에 협조공문을 보내 통관시 관세를 물지 않도록 요청한다. 이 과정이 모두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해당 영화 프린트는 ‘무담보, 무관세, 무심사’라는 세 가지 조건하에 영화제쪽에 수급된다.
다양한 돌발 변수 ‘무담보, 무관세, 무심사’ 수급 어려워
하지만 영화 촬영현장처럼 영화제도 돌발 변수가 많다. 이를테면, 프로그래머가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 상대와의 협상을 마무리해도 이미 신청했던 작품 목록에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일반적인 통관절차를 거쳐 세금을 물고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환경영화제 강윤주 프로그래머는 “여러 이유로 영화제에서 주요 상영작 중 한두편이 늦게 수급되는 상황은 빈번하다. 그런 경우 관계기관 협조를 통해 처리하는 방식이 시간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물고 통관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부분 영화제에서는 처음에 작품 목록을 최대한 늘려서 적어내는 편법을 사용하고 있다. 처음 목록에 올렸다가 영화제에서 상영되지 않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원이나 외국대사관을 통해 들어오는 일명 ‘외교행낭’의 방식으로 진행해도 문제는 남는다. 절차는 훨씬 간소하지만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최근 이 문제로 세관과 마찰을 빚었던 경험이 있다. 해당 영화는 다른 국가를 순회하고 한국에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과정이었다. 한국 상영이 끝나면 프린트의 원소유지인 프랑스로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프랑스 문화원과 공동으로 진행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한국으로 보낸쪽은 수취인을 서울아트시네마로 적어 보내는 실수를 범했다. 세관에서는 “외교행낭이 왜 서울아트시네마라는 단체로 가는가?”라며 프린트를 내주는 일을 거부했다. 정지영씨는 “그렇게 주장하고는 프랑스대사관에서 물건을 찾으려고 하니 수취인이 서울아트시네마이기 때문에 내줄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프랑스대사관이 세관과 승강이 끝에 프린트를 찾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세관은 관세를 내는 일반적인 통관절차를 받으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만약 상영 일정이 빠듯했다면 서울아트시네마측은 세금을 내고 프린트를 찾아왔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 최대 규모의 부산국제영화제나 시네마테크 부산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두곳의 상영은 모두 부산시가 진행하는 지자체 행사로 인정되기 때문에 부산시청으로 협조공문을 세관에 보내 해당 프린트를 수급한다. 전주영화제를 비롯한 지자체 소관의 다른 국제영화제들도 마찬가지다.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근무했던 박경남씨는 현재 세관이 프린트를 통관하는 태도에 대해 “이름있는 국가기관에서 공조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안 믿겠다는 관료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250∼300편에 달하는 영화의 프린트를 수급하다보면 업무상의 착오도 발생한다. 프린트가 들어올 때는 “해당 물건을 세관에서 석달 내에 재수출해야 한다”는 조항이 적용되는데 단기간에 수백편의 프린트를 취급하다보니 반출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한다. 이럴 때는 꼼짝없이 세금을 추징당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박경남씨는 “매년 프린트 수급을 담당하는 분들이 3개월 정도 단기로 채용되기 때문에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인력 구조”라고 지적했다. 스폰지 조성규 대표도 “현재의 과정이 심한 규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느 나라에서도 이 정도 절차는 있다. 한편으로 영화제에서 그런 인력들을 전문화해야 한다. 인력 양성이 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합당하지만 현재 영화제들의 예산 구조와 한시적인 인력 구성을 감안하면 국내 어느 영화제도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과제다.
프린트 수급 지원 구조 일원화 고려해야
문광부, 지자체, 영진위로 분산된 현행 프린트 수급을 지원하는 구조를 일원화하면 어떨까.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심의에 관련된 사항이 변화하면 일원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영진위가 작품 수급에 대한 심사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국내 영화제 프린트에 관련된 분산된 업무지원을 영진위가 전담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기존 영화제 업무나 시네마테크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이 프린트 수급에 대해 각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의 실무자들과 네트워킹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기 채용이 빈번한 영화제의 인력 특성을 감안해 영진위가 사전교육 및 재교육 차원에서 프린트 수급 업무 교육을 연동하면 전문 인력 양성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강윤주 프로그래머는 “예산이 7억~8억원에 달하는 영화제들보다는 작은 영화제에 오히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제안”이라고 예상했다. 조성규 대표도 “영화제끼리 치이는 현재의 난립상을 엄격히 검증하고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그런 방식의 일원화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불필요한 영화제 난립을 제어하고, 관료적인 복잡한 절차로 생기는 영화제의 과중한 업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일원화는 고려해볼 만하다. 관련 기관의 일원화, 전문인력의 양성과 함께 ‘비상업적 영화제의 무관세 프린트 통관’을 영화법에 명문화한다면 세관과 영화제쪽이 벌어지는 현재의 불필요한 마찰은 대부분 해소될 수 있다.
영화제의 특급배송, 외교행낭
통관절차 특혜, 맘 급한 영화제 돕는 도우미
일명 파우치(Pouch 혹은 Diplomatic Pouch)라고 불리는 외교행낭은 본국 정부와 재외공관 사이에 문서를 주고받는 가방을 뜻한다. 국제법상으로 주재국 정부나 다른 국가는 열어볼 수 없도록 규정됐기 때문에 행낭은 암호와 납봉을 거친다. 이러한 외교행낭을 영화제에서 이용하게 된 이유는 통관절차가 간소하기 때문이다. 운송과정은 똑같지만 통관절차에서 특혜를 받기 때문에 시간을 다투는 영화제 입장에서는 프린트 반입에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영화제라는 행사의 특성상 외국 문화원이나 대사관과 공동주최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교행낭을 통한 프린트 수급이 늘어난 측면도 있다. 신상옥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1만 5천편의 프린트를 보유한 영화광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외교행낭을 통해 외국영화의 프린트를 대거 수집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국민연대 자료집>에 의하면 과거 박정희 대통령도 당시 국내에서 금지된 일본영화를 이 방법으로 수집해 자주 감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