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서는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 대해선 열려 있다.” 배우들보다 더 열심히 눈물을 찍어내는 관객을 보고 떠올린 <탈무드>의 한 구절이다. 역시 멜로드라마의 위력은 놀랍다. 제목만 보면 룸바풍의 신나는 리듬을 타고 리라꽃 향기가 스며나올 듯하지만, 영화는 선전문안대로 ‘사랑을 위한 하룻밤의 거래’를 다루고 있다. 사랑을 위한 흥정은 자그마치 1억원에 낙찰된다.
웬만한 외화팬이라면 <은밀한 유혹>(1993)이 생각났을 것이다. 로버트 레드퍼드로부터 100만달러짜리 하룻밤 잠자리를 제안받은 데미 무어가 남편 우디 해럴슨을 설득한다. “육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죠. 사실 우리도 결혼하기 전에 각자 애인이 있었잖아요?”라는 아내의 말이 남편에겐 “미시시피강에 배 지나간 자리 있나요?”로 들린 것 같다. 거액을 챙겼지만 낯선 이웃보다 멀어진 부부 사이를 파고든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은 결말부를 아리송한 해피엔딩으로 봉합한다.
까딱하면 뒷북치는 꼴이 될 터이니 <베사메무쵸>가 갖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겠다. 전윤수 감독은 처음부터 새로운 품종의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쓴다. 에로틱한 상상력일랑 아예 접어두라며 웃음꽃이 만발한 가정을 소개한다. 한국영화에 가족이 등장하는 게 얼마 만인가. 왁자지껄한 아침 풍경이 정겹고 여섯 식구들의 과장된 동작도 반갑다. 불행은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주식값을 조작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어긴 철수가 해고당한다. 게다가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서서 거리에 나앉을 신세가 되었다. 정직함이 무능함으로 둔갑하고 때로는 성실한 게 죄가 되는 세상이다.
기발한 발상이나 충격적인 반전 드라마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낡아빠진 소재라고 코웃음칠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감동은 동시대인들의 ‘경험의 보편성’, 즉 ‘저것이 내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공감대에서 온다. 실직과 파산이라는 두 사건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진다.
아프도록 서러운 삽화를 덧붙인 초반부는 리얼리즘영화의 본령을 보여주는 듯하다. 옛날 충무로 표현대로 ‘된장’을 걸쭉하게 풀어넣지만,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듣고 찾아볼 수 있는 사건들이다. 죽은 시아주버니의 빚, 삯바느질, 장기매매 같은 진솔한 삶의 기록은 경박한 몸짓과 헤픈 농담에 질려버린 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신인 전윤수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과 박희주의 매끄러운 카메라 운행이 눈여겨볼 만하다. 선물로 받게 될 구두를 겨냥한 영희의 발숏, 단색 화면에 악몽처럼 살아나는 궁핍한 시간과 원경으로 잡은 전철의 아스라한 불빛, 속살을 드러낸 여인의 섬뜩한 이미지와 이삿짐에 파묻혀 끼니를 때우는 가족들의 부감숏 등 공들여 찍은 흔적이 뚜렷하다. 병든 자식을 두고 내려오는 철수와 영희가 서로 악다구니치는 장면이 가장 실감난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두 사람에겐 빚이야말로 최악의 빈곤이었다. 억척스런 아줌마와는 거리가 먼 이미숙이 모처럼 질컥질컥한 연기력을 과시한다.
페미니스트 진영의 시선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40여년 전 한국영화 <여자만이 울어야 하나>를 기억한 것일까. 현실인식의 깊이를 보여준 감독은 중반부터 패착에 가까운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철수가 무책임한 남편에서 용맹한 아버지로 바뀌는 과정이 헛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억지스럽다. 아무리 쪽박을 찼기로소니 부부가 동시에 알몸으로 1억원짜리 거래를 트는 게 가능한 일인가. 작위적인 상황과 우연의 남발은 상식의 세계를 사는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사무실에서 유부녀와 철수가 벌이는 육박전도 <폭로>(1994)에서 마이클 더글러스가 농락당하는 장면을 빼닮았다.
묘사보다 설명에 치중한 화면을 보는 일은 괴롭다. 연쇄극 수준의 넋두리는 슬픔을 강조하려다 오히려 슬픔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초반부의 무시무시한 떨이낙지 쟁탈전은 영희의 수상쩍은 족보로 연결된다. “우리 엄마는 낙지를 훔쳐 날 먹였는데 나는 그냥 와버렸어.” 자식을 위한 도둑질은 값지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매음도 문제될 게 없다? 아내의 고백에 대한 철수의 반응은 한술 더 뜬다. 정조대를 채우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는 건가. “나랑 애들을 생각하면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갖고 갔어야지. 고통스러워도 혼자 삼켰어야지. 이제 어떻게 살래?”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가출한 아내가 돌아오기는 온다.
도덕률과 모성애 사이에서 헤매던 영화는 감상주의의 멍석을 깔더니 끝내는 ‘칼로 물베기’식으로 어물쩍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판정을 내리는 일은 언제나 관객의 몫임을 알아야 한다. <베사메무쵸>는 곁가지도 많을뿐더러 군데군데서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지지하는 까닭은 고단한 시대를 사는 소시민들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탄탄하고 묵직한 시나리오를 업은 전윤수의 연출력을 보고 싶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jerue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