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주의는 모두가 한곳만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제작 현장의 수직적 구성은 업무 중복은 물론, 작업 효율을 떨어뜨리고, 팀원간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 영진위 인적자원 육성과 제작환경 개선 소위원회 산하 실무추진단이 내놓을 ‘한국 영화산업의 직무분석과 직무표준을 위한 연구’(가제)의 골자는 지난주 기획리포트에서 강조했듯이 “그러한 일렬 종대를 수평적인 횡대로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와 남아 있는 도제 시스템은 스탭 업무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혼란을 일으킨다. 개인 능력과 상관없이 직급으로 업무영역과 기능이 설정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팀장(혹은 헤드급 기사)이 되거나 그렇지 못한 인력은 현장을 떠나는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진다. 이것은 충무로 전체의 경쟁력 저하이며, 노하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이러한 악순환은 충무로뿐만 아니라 영화교육 현장에서도 악몽처럼 반복된다. 최근 충무로에서는 “유능한, 아니 제대로 된 포커스풀러나 붐오퍼레이터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푸념이 나온다. 그 이유는 포커스풀링에 익숙해질 무렵 대부분 촬영퍼스트는 촬영감독으로 입봉하기 때문이다. 붐오퍼레이터도 상황은 마찬가지. 올해 1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현장에서는 “스케일도 재지 않고 모든 포커스를 맞추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합당한 대우와 적절한 업무 구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촬영ㆍ조명분야 - 한국형 DP 시스템 논의 필요
촬영감독을 앞두고 “나는 포커스풀링(화면의 초점을 맞추는 작업)의 전문가가 되겠다”며 버틸 사람은 지금 충무로에 없다. 촬영팀 구성과 영화제작 전반의 인력 구조를 바꿔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직무분석은 촬영감독 아래 퍼스트, 세컨드, 서드, 막내로 내려오는 현재의 종적 구성을 업무 영역과 책임에 따라 포커스풀러, 클래퍼, 로더의 수평적 구조로 전환하기를 제안한다. 촬영조감독 포커스풀러는 카메라의 기능적 요소와 포커스풀링에 집중하고, 클래퍼는 연출부가 맡던 슬레이트 작업과 카메라 장비 관리를 맡는다. 로더는 직무명처럼 필름 장착을 비롯해 필름 전반에 관한 업무를 맡는다. 인원 축소로 인한 업무량 증가는 그립팀과 인턴으로 대체한다. 한국형 DP시스템(촬영감독이 모든 권한을 갖고 조명감독이 팀장으로 활동하는 형태)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현장에서는 이미 DP시스템을 실시하는 촬영팀도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 방식을 국내에 고스란히 적용하는 건 무리다. 현장영화인 대다수가 DP시스템의 장점은 인정하지만 한 사람에게 촬영과 조명의 전권을 맡기기보다는 변형된 구조로 운용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현재처럼 촬영팀과 조명팀의 개별적 존재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개선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조명 파트는 업무 영역을 좀더 구체화하고 “현재 개별적으로 고용되는 발전차 기사를 조명팀의 인력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다”고 직무분석은 제안했다. 조명팀 개선안은 전기의 배선과 공급을 전담할 ‘전기기술자’라는 직무를 신설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기분야를 별도로 구성해 조명감독, 조명팀장 아래에 조명과 전기 파트를 수평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이다. 노동 강도를 낮추고 이렇게 분화된 인력 구조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그립팀 신설이 필수적이다.
미술분야 - 프로덕션디자이너 총괄 일원화된 구조 제안
직무분석의 제안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미술이다. 미술 파트는 들쭉날쭉한 개별 영화의 크레딧만 봐도 인적 구성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예상이 가능해진다. 프로덕션디자이너, 미술감독, 아트디렉터라는 명칭이 일률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작품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다. 소품도 시대극은 외부업체, 현대물은 미술팀 내부에서 소화하는 경우도 잦다. 직무분석은 프로덕션디자이너가 미술, 세트디자인, 의상, 분장, 소품을 총지휘하는 일원화된 구조를 제안했다. 프로덕션디자이너는 미술 업무를 총괄하고 아트디렉터가 촬영진행을 책임지는 형태(표-1 참조)다. 기존 구조에 비해 개선안은 프로덕션디자이너가 현재보다 미술 전 분야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작업의 통일성을 높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팀별로 수직화된 구조를 개선하고 세트디자인, 세트 데커레이션, 의상디자인, 헤어메이크업은 팀별 영역을 책임지며 유기적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미술의 창조적인 영역과 노동이 필요한 부분을 분리시키기 위한 시도다. 현장에서 촬영 내내 미술작업의 보완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미술팀의 동선과 업무량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새로운 구성을 통해 프로덕션 단계별로 인원을 투입하는 유연성을 극대화하고 촬영이나 조명처럼 각 팀의 막내는 인턴으로 대체하는 인력 운용이 동반된다.
후반작업 분야 - 프리랜서ㆍ공동작업 등 제안
편집, 시각효과, 사운드, 현상을 포함하는 후반작업에서는 현황 파악과 탄력적인 팀 구성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졌다. 다른 분야가 팀 중심이라면 후반작업 파트는 업체별로 묶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책임소재와 업무 영역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후반작업 특성상 분야별로 가장 능숙한 전문가들을 배치해 팀을 최적화된 상태로 꾸리는 면에서는 유연성이 부족한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프리랜서의 적극적인 고용이나 회사간의 공동작업을 통해 작업의 질적 향상을 꾀할 필요가 있다. 10년 이상 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작업한 후반작업 업체가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유연한 인적 구성은 업체 입장에서도 빠른 노하우 축적과 기술 공유라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안정된 기술이 확보되면 해외 프로젝트 발주를 통해 영역을 확장하는 일도 가능하다. 편집 분야는 현재 연출부에 소속된 현장편집을 편집기사의 소관으로 바꾸고 후반작업 중 편집과 연계하는 방향으로 편집팀을 구성하는 것을 연구는 제안했다. “현장편집을 믿고 촬영의 사전준비가 소홀해지거나 안이한 대처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현장의 지적을 감안하면 현장편집은 전문화된 편집 파트로 재배치되는 것이 프로덕션의 효율을 위해서도 긍정적일 것이다. 현장편집 인력 입장에서도 감독의 보조 역할보다는 독립된 전문 영역의 확보라는 이점이 있다. 어느 분야보다 공정과 업무영역이 명확한 음향은 이러한 탄력적인 인력 운용이 합리적으로 가능하리라고 연구는 예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믹싱과 대사 편집이 중심이 되는 음향실을 결정하고, 폴리나 SFX는 별도 인력 혹은 팀을 보강하는 구성이 타 분야에 비해 유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동시녹음 분야에서 부족 현상을 보이고 있는 붐오퍼레이터 양성과 전문화의 필요성, 특수효과 분야의 자격요건 강화 및 특수 기자재에 대한 정부 지원, 캐스팅 디렉터 영역의 활성화 등이 기타 분야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제기됐다.
이번 직무분석은 현장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연구가 그저 연구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적용 여부에 대한 판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연구 인터뷰에 응했던 싸이더스FNH 김선아 PD는 “ 로케이션 매니저나 제작회계 같은 분야는 그 자리만으로 전문직이 될 수 있지만, 지속적인 숙련을 통해 단계를 밟아야 하는 분야도 많다. 그것을 분야별로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은 영화인에게 이 자료가 공유되고, 한명이라도 더 공청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일이 필요하다. 직무분석을 중심으로 한 제작합리화 방안의 마지막 기사는 공청회를 통해 듣는 현장의 견해를 중심으로 한 논의를 전할 예정이다.
촬영·조명·미술 보조 그립팀 도입 제안
육체노동 특화, 제작부 잡무 줄어 효율적
그립(Grip)이 필요하다. 직무분석은 육체노동이 필요한 촬영, 조명, 미술 분야를 보조하기 위해 그립팀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할리우드에서 일명 스테이지 핸드(stage hand)로 불리는 그립은 영화 제작현장의 잡역부이자 목공이다. 힘세고 발빠른 맥가이버라고 할까. 국내에도 촬영팀에 그립을 따로 두고 활동하는 촬영감독이 있다. 직무분석은 한정된 그 영역을 확대해 그립의 전면적인 도입을 주장한다. 수평적 인적 구성으로 인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기존의 육체노동은 특화된 그립팀에 맡기자는 것. 이것은 팀별로 막내들에게 주로 주어지던 애매한 업무 영역을 전문화하자는 발상이다. 그립은 프로덕션에만 참여하고 인원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력 구성의 효율을 꾀할 수 있다.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촬영, 조명, 미술 그립을 총괄하는 직책은 키 그립이다. 키 그립은 각팀의 감독 책임하에 전체 그립의 인원수와 투입 분야를 결정한다. 현장에서 미술팀이 세트를 고치느라 고생하고, 촬영이 지체되는 상황이 종종 일어난다. 장비 운반이나 철수 때문에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연출부와 제작부를 비롯해 다른 스탭들이 육체노동을 거들면서 고유 업무영역 외에 잡무를 떠안는다. 모 촬영기사는 “촬영, 조명팀의 인력 축소가 불가피하겠지만 영화를 제대로 찍기 위해서 그립팀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전반적으로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육체노동도 분명 전문화된 영역의 사람들이 맡아야 하고, 세트의 보수와 수리 같은 작업까지 그립팀이 감당한다면 프로덕션의 효율도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