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런 일상성의 사회적 특질을 내면화하고 있다. 일상성이란 지루한 반복을 중심원리로 하는데,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다시 내일로 이어지는 쳇바퀴를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사연 많은 인물들에게도 일상성의 하중은 압도적인 것이어서, 투명한 역사적 신념이라는 것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닫혀 있다. 스스로를 끈 떨어진 스파이로 규정하는 김기영은 물론이거니와, 남한에 잔존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 또 아내와 친구들, 심지어는 그들 모두를 실시간으로 탐색하고 있는 국정원의 박철수조차 이 견고한 무의미로부터 도무지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정말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것 같으냐?” 이 말은 김기영의 부친이 주체사상을 맹목적으로 암송하던 어린 김기영에게 되묻는 말이다. 이 말의 끝에서 그의 부친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큰 물이 나서 둑이 터지면 인간은 개돼지와 다를 게 없어. 그냥 휩쓸려서 떠내려가는 거야.” 이런 발언들에 의해 신념은 소거되고, 역사는 상대화되는데, 자연스럽게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모든 숭고해 보이는 개념들은 소설 속에서 그 빛을 잃는다.
<빛의 제국>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소설이지만, 사실상 그 표제는 역설에 속한다. 20년이라는 기억의 경계 속에서 단 하루 동안에 진행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인 이 소설에서 그 ‘빛’은, 내 판단에 이제는 과거화된 신념이랄까 이데올로기의 은유로 판단된다. 빛의 제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소설은 그런 빛의 소멸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에 가깝다.
그 부정은 김기영의 의식을 관통하면서, 또는 여러 ‘과거’를 갖고 있는 인물들의 일상성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엇비슷하게 회색지대에 안착한다. 그럴 때, 현실은 더욱 생생하지만 무의미하고, 과거는 분명하게 단죄되지만 역시 납득할 수 없는 빗나간 신념의 용광로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과 역사 모두가, 사실상 집적된 오류의 결과였던 까닭에 오히려 생생하게 감각되던 현실조차도 허방으로 느껴진다면, 소설 속의 진술처럼 김기영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지금 연옥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존재근거가 없으므로 치열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기묘한 역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 역설을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 치밀하게 구조화하는 김영하의 시도는 작가 편에서 보면, 대체로 성공적이다. 요컨대 인물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통제력이 분명하게 관철되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엇비슷해졌다. 인물간의 갈등이 약화되면서, 김기영의 내적 갈등이 증폭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독자들의 사유의 여백을 좁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