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탭도 안정적인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개별 스탭의 구성, 역할, 책임소재 등을 꼼꼼히 명시한 직무분석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 영화진흥위원회 인적자원 육성과 제작환경 개선 소위원회 산하 실무추진단(단장 이현승)이 오는 9월 말 공청회와 함께 ‘한국 영화산업의 직무분석과 직무표준을 위한 시안’을 공개한다. 직무분석이란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개별 스탭의 역할, 업무내용, 참여기간을 상세히 밝히는 일이다. 현 시점에서 직무분석과 직무표준의 확보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영화 현장 스탭이 꿈을 위한 막연한 ‘희생’이나 ‘기회’가 아니라 구체적인 ‘직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산업적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발표에 앞서 연구 내용을 현장 영화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논의를 활성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직무분석과 직무표준은 개별 영화사나 단체의 실행만으로 정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네21>은 직무분석을 필두로 제작 시스템의 합리화를 위해 실무추진단의 성과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직무분석은 중규모 예산(순제 30억∼35억원)의 작품을 기준으로 최소 인원을 염두에 둔 스탭 구성을 기반으로 제작, 연출, 촬영, 조명, 미술, 후반작업, 기타, 그립 등 총 여덟개 분야가 다뤄졌다. 이번 연구의 골자는 3개 분야(로케이션·제작회계·프로덕션)의 제작부장 제도, 전문조감독과 기획조감독의 도입, 한국형 DP(촬영감독) 시스템 지향, 의상과 분장을 아우르는 미술총감독의 역량 강화와 조경팀의 신설, 그립팀과 인턴제도의 신설 등이다. 이번에는 직무분석의 의의와 연출부와 제작부의 개선 방안을 주로 소개하고, 다음 글에서는 나머지 분야의 개선 방향과 전망을 다룰 계획이다.
제작부장 고유영역 규정, 업무 중복과 잡무 해소
기존 제작부는 프로듀서, 제작실장 및 라인 프로듀서, 제작부장(1~2명), 제작부(4~5명)가 종적 구조를 이루며 제작회계가 추가되는 인적 구성을 가졌다. 그러나 개선안은 라인 프로듀서 아래 전문화된 제작부장 3명(행정회계, 로케이션, 현장)을 두는 구조를 택한다. 라인 프로듀서와 제작부장들 아래는 각각 조수들이 한명씩 배정된다. 기존 구조는 서열화된 종적 구성으로 인해 업무가 중복되거나 불분명한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프리 프로덕션이 짧은 국내 여건을 감안할 때, 제작부원들은 늘 로케이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업무에 시달린다. 이에 비해 개선안은 제작부장들에게 고유한 업무영역을 규정함으로써 업무 중복과 잡무의 해소를 꾀한다. 제작부원들이 감당하던 현장통제를 비롯한 단순업무는 인턴에게 맡겨진다. 계획대로 제작부장들의 업무가 분산되면 라인 프로듀서는 일정관리라는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다. 초기 인원 배치만 보면 기존 구성보다 인원이 늘어난 듯하지만 기간별로 인력의 증감이 있으므로 운용만 잘한다면 오히려 슬림하게 조직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케이션 제작부장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주로 참여하고 프로덕션 시에는 촬영지 점검에만 관여한다.
연출부 기술적 영역과 창의적 영역 분리
제작부가 세분화로 변화를 모색한다면, 연출부는 전문조감독의 지향과 새로운 기획조감독의 도입을 골자로 한다. 현재 연출부는 감독 아래 조감독, 퍼스트, 세컨드, 서드, 막내 연출부가 수직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스크립터가 추가된다. 대안은 기존 구조에서 조감독 아래 제2조감독만 두고 나머지 연출부는 인턴(1~2명)으로 해결한다. 조감독과 별도로 영화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는 기획조감독이라는 역할이 마련된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일상적인 전문조감독의 지향은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논의된 사안이다. 이러한 이분화된 연출부 구조는 기술적 영역과 창의적 영역을 분리하는 시도다. 기획조감독의 도입으로 조감독은 현장진행에 매진할 수 있다. 기획조감독은 능력 여하에 따라 조감독을 겸할 수도 있다. 단, 기획개발 단계에 참여하는 기획조감독이 조감독을 겸할 경우 프리 단계에서 다시 계약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화노조의 출범, 제협과의 단체협상 등으로 스탭 처우 개선과 전문화의 문제가 어느 때보다 고조된 현 상황에서 직무분석은 합리적인 제작 시스템 마련을 위한 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이필름 오기민 대표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제작 시스템의 합리화는 속도의 문제만 남았을 뿐 이미 대세다.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상기 내용처럼 이번 연구는 “기존의 수직적 인적 구성을 수평적 구성으로 유도하는 것”을 뼈대로 삼고 있다. 안지혜 실무단 책임연구원은 “직무분석에 관한 연구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현장 인력 구조의 개선 방향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한다. 그는 “영화계에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직업적인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고민 중 하나였다”고 덧붙였다. 결국 쟁점은 실제 현장에서의 적용 여부다. 이번 연구 결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던 청년필름 신창길 PD는 “꼭 기사나 감독이 아니더라도 전문화된 영화 인력으로 일하겠다는 스탭의 의지와 그에 상응하는 대접과 지위를 보장하는 제작사의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중견급 팀장 혹은 실무자들이 재생산되고 생계유지와 직업적 전망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상황을 형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제작 시스템 합리화를 위한 첫걸음인 직무분석은 이제 영화계의 격렬한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실무추진단장 이현승 감독
“생계도 유지하고 자아실현도 할 수 있는 꿈의 공장으로”
디렉터스 컷과 감독조합의 산파였던 이현승 감독이 직무분석과 직무표준 연구를 추진한 일은 자연스럽다. 그는 이미 2002년 영화인회의에서 제작환경 개선에 대한 연구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스탭의 구성 방식을 고민하고 전문성을 측정하기 위해 시작한 이번 작업은 실무단에 소속된 10여명의 연구원이 현장 영화인들을 면접과 인터뷰를 통해 만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현승 감독은 “대부분의 영화 스탭들이 자기 직업의 안정성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감독이나 파트의 우두머리가 되지 못하면 영화계를 떠나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자기 파트의 일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연구의 배경을 밝혔다. 영화 스탭의 직업적 안정성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평가와 그에 따른 인적 구성이 필수적이다. 그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서열상으로 수직계열화되어 있는 현 상황을 수평적으로 네트워킹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스탭 처우 개선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사실상 팀별로 계약하는 현재의 방식은 전반적인 임금 상승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제작사 입장에서는 “개별 임금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각자의 능력을 검증할 수 없다”는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직무분석은 영화계의 인적 운용에 대한 첫걸음이다. 이현승 감독은 “이것이 안착하면 2단계로 재교육을 포함한 전문성을 위한 영화계 내의 교육사업을 펼쳐야 한다. 그 다음은 경력을 인증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장기적으로는 영화인력 운용센터 같은 곳을 만들어 기존 인력의 경력이나 프로필을 관리해주고, 신규 인력의 진입에도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