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일종의 인공낙원이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초현실적인 공간, 현실보다 더욱 멋진 공간들을 보는 재미도 영화의 큰 재미다. 그러나 이 모두를 실제 로케이션으로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영화적 상상력을 온전하게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카메라에 찍히는 현실을 조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또한 마이크에 담기는 소리를 조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 제작진은 세트와 CG로 불가능한 세계를 만든다. 소리와 빛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감독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그래서 기본적으로 외관은 로케이션, 내부는 세트라는 공식에 많이 의존한다. 가령 <살인의 추억>처럼 경찰영화는 로케이션으로 찍고, 내부 취조실(그 유명한 봉준호식 보일러가 있는 지하실)은 세트로 만들어 찍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유명한 장도리신은 세트가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하는 장면이다. 건물 외곽이야 당연히 로케이션해서 바깥에서 찍지만 장도리신의 협소한 복도는 로케이션해서 찍을 수가 없다. 빌리는 데도 돈이 들거니와 그렇게 엄청난 격투가 벌어질 경우 생길 손해를 어떤 건물주가 책임지고 싶어하겠는가. 더구나 좁은 복도를 카메라가 원활하게 트래킹을 하고, 천장에 무수하게 조명을 달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장을 또 뜯어내야 한다. 아마 그 정도 조건이라면 건물주가 욕설을 한 바가지 뱉어낼 것이다. 세트를 지으면 카메라가 전지적인 시점을 취할 수 있다. 흔히 ‘벽떼기’라고 하는 ‘덴깡’을 통해 벽을 부수고 복도를 늘리면서 카메라가 더욱 박진감있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세트를 지으면 돈이야 많이 들지만, 그리고 지었다가 허물어야 하는 아픔은 있지만, 조명과 카메라가 원하는 위치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주위의 소음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로케이션할 경우 사방에서 나는 소음과 목소리, 심지어 애완견 짖는 소리 등이 촬영하기도 전에 제작진 힘을 빼놓는다. 세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인공낙원인 셈이다. 그러니 화면은 로케이션보다 훨씬 ‘뽀다구’가 나고 스타일리시하다. 세트 못지않은 자연스러운 로케이션을 찾는 것도 좋겠지만 임대기간의 압박이 심하다. <다세포 소녀>처럼 신인배우들을 데리고 한다면 그 압박은 더 커진다. 세트장이라는 인공낙원을 굳이 마다하는 이들은 리얼리스트들이다. 현장의 잡음 하나조차도 더 우겨넣으려 하는 홍상수 감독은 세트 없이 작업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미술팀도 없다. 배우들은 시간이 만든 자연스러운 퇴적물인 공간과 함께 스며 들어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