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강추! 나루세 미키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경험을 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 사람이 살아본 물리적 시간보다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극장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나온 소년 소녀가 나누는 가벼운 대화 속에 들어 있어 크게 의미심장한 느낌은 없지만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생각이 투명하게 들어 있는 말이다. 그 뒤로 한동안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 라는 말을 곱씹곤 했다. 쉬운 말이지만 정작 그런 영화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가 장르로 발전시킨 영화의 대부분은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라기보다 꿈을 대신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고 하더라도 스필버그나 피터 잭슨의 영화를 보면서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갖긴 어렵다. 반면 에드워드 양이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볼 때는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강렬히 받는다. 그리고 이런 영화의 전통을 찾아가면 어쩔 수 없이 일본영화의 두 거장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다. 그중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4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47132;다. 영화광이라면 누구나 이르건 늦건 오즈와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오즈 다음엔 반드시 나루세, 란 말을 꼭 덧붙이고 싶다.

<부운>

나루세의 영화를 처음 본 건 4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서다. 그때까지 나루세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역대 일본영화 베스트10에 반드시 그의 영화 <부운>이 꼽힌다는 것, 오즈가 <부운>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말했다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는 애절한 러브스토리, 하면 떠올릴 어떤 예상에도 맞지 않았다. <부운>에서 묘사된 사랑은 서로 보고 싶어 못 견디는 절절함도 아니었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였다. 영화는 사랑을 미화하지 않으며 상처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지도 않고 삶의 우여곡절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나루세 영화의 열렬한 옹호자인 에드워드 양의 말대로 “너무도 정직하게” 삶의 신산스러움을 그릴 뿐이다. 그리하여 나루세의 영화를 보고 났을 때는 누구라도 결국 신음소리처럼 이렇게 탄식하고 말 것이다. 아,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고.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나루세에 대한 오마주로 나루세 빵집을 등장시킨 적이 있다. 삶의 곤경을 혼자 힘으로 헤쳐가는 강인한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였기에 그럴듯한 작명이었다. 금자씨처럼 나루세의 여인들은 불행을 등에 업고도 결코 투정을 부리거나 칭얼대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한국영화엔 왜 이런 여자 캐릭터가 없는 걸까, 불만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삶을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여자가 단순한 볼거리가 되는 영화들이나 사나이의 길을 막는 장애물로 설정된 영화들 또는 구원의 여신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결국 세상의 절반을 외면하는 거짓된 시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나루세의 영화가 종종 남성을 비난조로 바라볼 때 그 몸서리치는 사실성은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부운>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한때 사랑했으나 번번이 몹쓸 짓을 했던 남자가 외딴곳에서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여자를 바라본다. 그곳엔 오직 두 남녀밖에 없지만 남자는 온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시간이 닥친 것이다. 나루세는 홀로 남은 남자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몽땅 짊어지고 남은 평생을 후회하게 만든다. 냉정하지만, 정직한 결론이다.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은 하이퍼텍 나다에서 10편을 상영하고,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서울 상영작에 10편을 더한 20편을 튼다고 한다. <부운> 얘기를 했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산의 소리> <밥> <만국> <흩어진 구름> 등 하나라도 놓치면 후회할 걸작들이다. 완소 나루세 강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