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연재만화 <다세포 소녀>를 출판물로 바꿔낸 1권의 1화 ‘발광하는 사춘기’편은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도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무쓸모 고등학교의 수업시간, 교사(이재용)가 친절한 목소리로 공지한다. “오늘은 영어 선생님이 성병에 걸려서 못 나왔으니 내가 대신 수업한다. 뭐, 원조교제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XX도 병원에 한번 가봐요.” 지명당한 학생은 잠시 항변하지만 매독이란 병명을 듣는 순간 한달음에 조퇴한다. 조퇴는 조퇴를 부른다. “너, 너도 저놈이랑 했어? 나랑할 때 처음이라며?” “일대일은 처음이라는 얘기였지.” 결국 교실에 남은 학생은 숫총각 외눈박이(이켠)뿐이다. 교사는 이같은 사태를 마주해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만 외모 때문에 순결할 수밖에 없는 외눈박이를 위로한다.
영화에 관한 많은 정보를 짧은 순간, 명쾌히 알려주는 서두다. 원조교제를 긍정하는 자세를 갖고 있고, 고등학교지만 처녀, 총각의 사전적 의미는 실재하지 않으며, 자유분방한 성생활의 관계망에 교사 역시 한축을 이루고 있어 교사 대 학생의 대립전선은 그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외눈박이 같은 명시적인 소수자가 곧잘 등장한다. 문란한 교풍이 정상성으로 통하는 이곳에 사연을 만들어내는 비극적 인물이 있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김옥빈)는 산동네 단칸방에서 병든 엄마와 동생을 정성껏 부양하는 효녀이지만 궁상맞은 가난으로 깊은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다. 스위스에서 전학온 부유한 꽃미남 안소니(박진우)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안소니는 외눈박이의 동생 두눈박이(이은성)에게 마음을 빼앗긴 터다. 두눈박이는 아름다운 여장남자다. 삼각 멜로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건 아니다. 소녀가 가난 때문에 결심한 원조교제 에피소드와 여기서 가지쳐가는 해프닝들이 중심이다(원작 만화처럼 독립성이 강한 에피소드 각론을 즐겨달라는 것이 감독의 주문이기도 하다).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학교와 교사의 권능을 간단히 압도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둠의 장막을 내려 서로의 몸을 탐하게 만든다. 또 가난 소녀에게 잠시나마 부와 명성을 안겨주는 등 요소요소에 등장해 사건의 변곡점을 만든다.
<다세포 소녀>가 이재용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이란 게 우연일까? 장르적 외양을 놓고 보면 그의 장편은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구호에 맞춰 걷는 듯 홀짝의 리듬으로 갈리고 있다. 첫 번째 <정사>와 세 번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품격있는 멜로와 매끄럽게 흘러가는 서사를 지녔다. 다만 스케일의 차이가 존재한다. 짝수항을 이루는 두 번째 <순애보>와 네 번째 <다세포 소녀>는 서사를 흩뜨리며 감정의 이입보다 거리두기를 의도한다. 여기에도 스케일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홀수항의 차이와는 좀 다른 종류다. 제작의 규모가 아닌 취향의 규모 차이다. 코미디와 뮤지컬을 곁들여 휘저을 수 있는 손발의 여지를 넓히고는 <순애보>보다 노골적으로 감독이 지지하는 취향을 담았다. 이재용 감독은 음습하고 칙칙한 기운으로 이미지화한 세계를 건조하게, 심지어 아름답게 탈색시키는 재주를 지녔다. <순애보>에서 우인과 아야를 이어주는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의 세계가 그랬다. 홀수항 작품이 감독의 오른발이라면, 짝수항 작품은 왼발이다. 어긋나 보이는 작품의 취향은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홀수항의 멜로조차 보이는 것의 이면에 더 집중하긴 했다. 순수의 멜로를 살짝 까뒤집으니 어둠과 풍자가 깃든 멜로가 나왔다. 이런 취향이 단적으로 쓰인 장면이 있다. 교사가 한국적인 것을 도통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학생들을 향해 최후의 수단을 쓴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 학생이 때리고 선생은 맞는다. 카메라는 선생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매질 사이사이에 안타까워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끼워넣지만 그들이 볼 수 없는 이면, 즉 칠판으로 향해진 선생의 얼굴은 희열과 쾌락으로 젖어들어간다. 그걸 보자는 게 이 신의 목적이다.
예이츠(와 그의 시)를 엉덩이로 살짝 뭉개는 감독의 취향과 어울리는 ‘다세포 취향’은 이렇다. 매질을 자청할 때 교사는 굳이 바지를 내린다. 내린 바지 위로 드러나는 야릇한 팬티. 학생들은 일제히 카메라폰을 꺼내들고 교사의 엉덩이를 찍을 뿐 교사의 야릇한 취향을 비난하거나 의문시하지 않는다. 다세포 취향은 사회적 발언이기도 하다. 아버지나 조폭 보스 같은 원조교제의 수요자까지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또 학생들이 놀랍도록 일사불란하게 데모를 일으키는 순간이 있다. 교장의 몸에 숨어든 ‘괴물’이 여학생에게 약을 먹이고 사타구니에 약을 놓아 범생이로 바꿔놓는 바람에 학교의 정체성 유지에 장애가 생겼을 때다. 그런데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학생들이 쏘아대는 음풍·양풍 신공이 오히려 ‘괴물’의 오랜 소원을 이뤄주고 구원해준다. 웬만한 음지를 모조리 양지로 바꿔내는 것, 이것이 다세포 취향이 가진 사회적 효능이다.
금기시되는 취향에 대한 적극적 승인, 나아가 우월론을 펴는 것과 설득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무쓸고 학생들이 졸업한 뒤의 미래가 크레딧과 더불어 제시된다. 그것은 그저 희망사항에 속하는 결과들이다. 가난 소녀가 어떻게 가난과 이별하고 돈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됐을까. 설마 다세포 취향의 생활화로? 데모를 주동해 취향의 정체성을 지켜낸 이는 가난 소녀와 외눈박이 형제를 비웃던 부잣집 자제 테리&우스(이민혁, 유건)인 게 영화 속 현실이다. 그저 취향의 놀이로 끝내기에는 난감할 정도로 <다세포 소녀>는 많은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홀짝 패턴으로 추측한다면, 이재용 감독의 다음 작품은 <스캔들…>보다 규모가 큰 멜로가 되지 않을까. 그가 또 어떤 이면을 그려낼지 궁금해지는 게 다세포 효과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