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 제 뜻 부리면 어찌할 것인가. 할리우드처럼 동물연기를 끌어낼 전문 조련사도 없는 상황. 제작 과정에서 애초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지 그동안 동물영화는 액션영화에서 잠깐씩 등장한 것을 제외하곤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동물의 배역 비중이 큰 한국영화를 꼽으라면 <꼬리치는 남자>(1995) 정도가 아닐까. 경마를 소재로 한 영화 <각설탕>도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한참 애를 먹었다. 5년 전, “인마일체(人馬一體)의 스펙터클에 빠져들었다”는 이환경 감독은 당시 경마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지만 적당한 영화사를 찾지 못했다. 3년 전 “한 유명 경주마의 은퇴식을 우연히 보고서” <각설탕>의 원안을 떠올렸다는 이정학 프로듀서도 한때 적지 않게 퇴짜를 맞았다 한다. 그러니 제작진이 “국내 최초로 말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각설탕>은 기수가 되고 싶은 소녀 시은(임수정)과 말 천둥이의 교감을 그리는 영화다. 목장집 딸인 시은은 틈만 나면 죽은 엄마가 가장 아꼈다는 말 장군과 산책하길 즐긴다. 그러나 장군은 무리한 출산으로 뛰지도 못하는 새끼를 낳고 죽는다. 어미없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새끼를 어떻게 키우느냐며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겠다는 아버지(박은수)를 시은은 “엄마없이 나도 잘 컸다”며 가로막는다. 새끼말에게 ‘천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어미처럼 돌보겠다고 맘먹는 시은. 그러나 자신의 뜻과 달리 시은이 기수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천둥을 내다 팔게 되고, 이 일로 시은은 집을 뛰쳐나간다. 이후 시은은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냄새나는 말똥을 치우며 기수가 되는 꿈을 키워가고, 천둥은 호된 매질을 견뎌가며 옛 주인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후반부에 시은과 천둥이 만나 함께 레이스를 벌이지만, <각설탕>은 스포츠영화라기보다 가족영화에 가깝다. <씨비스킷> <드리머> 등 경마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영화들을 한번쯤 떠올려보라. 주인공 말은 대개 뛰어난 혈통을 갖고 있다. 천방지축인 야생마의 기질이 문제가 되거나 부상으로 인해 안락사의 위기에 처하지만, 이 말들은 비슷한 처지의 주인과 부단한 연습 끝에 경주마로서 가치를 유감없이 선보인다. 반면, <각설탕>은 그런 과정을 묘사하기보다 기적을 바란다(천둥이의 경주마로서 능력은 언급되지 않는다). 기적의 힘은 가족이다. 어미의 젖을 한번도 빨아보지 못한 천둥이에게 시은이 건네주는 각설탕은 어떤 먹이보다 달다. 시은은 천둥이에게 사랑을 쏟으면서 한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각설탕>은 피붙이 같은 시은과 천둥의 관계가 결국 기적을 만듦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촬영에만 무려 6개월을 쏟아부은 <각설탕>은 보고 나면 ‘무엇을’보다 ‘어떻게’ 찍었는지가 궁금해질 영화다. 엉덩이를 안장에서 들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말을 타는 몽키 타법을 촬영 전에 익혔다는 임수정은 영화 속에서 능숙하게 천둥이를 다룬다. 실제 기수가 레이싱 디렉터로 참여하고, 마필 관리감독이 직접 촬영현장에 상주하는 등 특수 스탭이 참여한 것도 특이하다. 훈련된 말이 아닌 탓에 천둥이는 촬영 초반 연기를 거부하며 무던히 제작진의 속을 썩였지만, 후반엔 임수정이 울면 따라 울 정도로 “배우가 됐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 좀처럼 분간하기 어렵지만 천둥이 역은 5필의 말이 번갈아 연기했다. 팔려간 뒤 나이트클럽 홍보에 쓰이던 천둥이가 시은을 알아보고서 인파와 차량을 헤치고 도심을 달리는 장면 등은 관객의 호감을 살 듯하다. 대규모 경마장에서 벌어지는 후반부의 경주 또한 볼거리로는 나쁘지 않다. 지미집(무인 크레인)과 카메라를 담고서 달리는 특수 트레일러를 활용해, 말의 1m 근접촬영까지 가능했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그러나 첫 시도라는 점을 접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가 천둥과 시은에 집중하는 탓에 주변 캐릭터들은 러닝타임 동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딸과 의절할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는 시은이 돌아오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응원군을 자처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마무리한다. 윤 조교(유오성) 또한 마찬가지다. 기수와 경주마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승부 전략을 일러줘야 할 윤 조교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침묵한다. 기수로서 시은의 능력을 단박에 알아보고, 마지막에 다신 달릴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맘껏 달리고 싶다”는 시은과 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통찰력을 선보이나, 어떻게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전혀 조언하지 않는다. 1등을 차지하기 위해 온갑 협잡을 벌이는 동료에게 주먹질을 하는 의로운 인물로만 남을 뿐이다.
시은과 천둥이 헤어지고 만나는 장면들에서 <각설탕>은 꽤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그 눈물은 흘리고 나면 찝찝할 염분액이다.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들진 않는다. 시은은 “말을 움직이는 건 채찍이 아니라 기수의 마음”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영화는 엄마를 향해 달리고 싶은 시은의 마음이 천둥이에게 온전히 전해졌다고 믿고 싶어한다. 과연 그런가. 후반부에 천둥이가 출전을 망설이는 인간들에게 히힝거리는 장면을 보자. 이것만으로 천둥이도 달리고 싶구나, 라고 덥석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도한 인간적 욕망의 투사는 아닐까. “말을 움직이는 건 채찍이 아니라 기수의 마음”이라는 시은은 반칙도 서슴지 않는 동료 철이에게 “넌 말보다 못한 새끼!”라며 채찍으로 후려친다. 말은 인간보다 더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여전히 인간보다 못한 동물일 따름이다. 시은과 천둥은 결핍의 크레바스를 결국 뛰어넘지만, <각설탕>은 모든 이의 시선을 숨막히는 결승점으로 유인하진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