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8월6일(일) 오후 1시50분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은 쇠락한 코미디언이었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쓸쓸하게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채플린의 동료 배우로 등장했던, 정말로 ‘쇠락한’ 버스터 키튼을 보고 있자면, 채플린은 매우 건재해 보인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고 말년에는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려 스위스에서 여생을 마쳤지만, 그는 비교적 꾸준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물론 그 대중성의 본질은 애매한 것이어서, 그의 죽음 뒤, ‘채플린’은 우스꽝스러움의 대명사로 상품화되어 왔다. 심지어 채플린의 영화는 그 시대의 다른 고전들과 달리, 목 빠지게 회고전을 기다리지 않아도 케이블 채널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 그러니까 전설적인 감독이자 배우이자 극작가인 채플린을 지금까지도 연명하게 해주는 건 아우라가 아닌, 대중적 친근함이다. 우리는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아무 때고 그를 볼 수 있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그의 영화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코믹한 움직임 속에 그 어떤 언어보다 날카로운 시선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지나친다.
<황금광 시대>는 1925년 찰리 채플린이 제작·감독·각본·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에서도 채플린은 여전히 작은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거리는 걸음을 걷는다. 그는 여전히 가난하고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영화는 황금을 찾으려는 찰리의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마을의 한 무희를 사랑하게 된 찰리의 감정적 변화를 따라가는 데 몰두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빈곤에 대한 사회 비판적 시선보다 눈에 띄는 것은 순수하고 착한 로맨스다. 실제로 채플린은 좀더 비판적인 작품을 구상했으나 할리우드와의 타협 끝에 찰리의 삶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여러 방식 중 하나는, 앞서 말했듯, 영화 속에서 채플린이 구현하는 가장 슬픈 순간의 울림을 듣는 것이다. 이 영화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새해 전날, 찰리는 무희를 초대한다. 그는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있다. 마침내 재야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축제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찰리는 적막한 오두막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가만히, 오랫동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슬픔을 표출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자의 슬픈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