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7월29일(토) 밤 11시
길 위에서 삶을 찾는 빔 벤더스가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9·11 이후의 미국을 이야기한다. 제목은 <랜드 오브 플렌티>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풍요의 땅’이 아니라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미국의 황폐한 진실이다. 카메라는 ‘풍요의 땅’의 빈곤을 드러내기 위해 정신적 공황 상태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거리의 노숙자들을 비춘다. 그들은 모두 반쯤 넋이 나간 채, 폐허가 된 뒷골목을 배회한다. 빔 벤더스는 묻는다. 몰락한 ‘꿈의 나라’에 희망은 남아 있는가?
폴은 9·11 이후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빈민 지역 곳곳을 순찰하며 미래의 테러분자들을 색출하는 데 몰두한다. 그의 조카인 라나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부모와 함께 선교활동을 벌이다 마침내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폴을 통해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애국주의를 보여주는 한편, 라나를 통해 빈민층의 현실, 즉 미국의 모순된 현실을 보여주며 그 사이의 간극과 대면한다. 그런데 한 아랍인의 살해를 기점으로, 시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둘의 여행이 시작되고, 이 양극 사이의 거리는 좁혀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의 강박증적인 신념이 라나의 박애주의에 의해 변화를 겪게 된다. LA의 빈민가에서 불안하게 대립하던 둘은 황량한 트로나를 경유하며 깨달음을 나누고 뉴욕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며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두 주인공들, 즉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애국주의와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는 기독교적 박애주의는 미국의 대표적인 두 얼굴이 아닌가. 영화 속 빔 벤더스의 문제의식이 주제의 무게에 비해 다소 순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테러분자라는 낙인을 달고 거리를 전전하는 미국 내 아랍인들과 유색인종들을 찍으면서도 무엇이 그들을 이 지경으로 내몰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9·11 이후 여전히 충격 속에서 헤매는 미국인들의 내면과 그 아픔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는 듯하다. 폴과 라나의 진심어린 소통은 그저 둘 사이에서만 맴돌 뿐이다. 노숙인들 앞에서 사랑의 힘을 설교하는 목사나 삶에 대한 감사로 충만한 라나의 모습이 거북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빔 벤더스는 조국을 사랑하는 폴과 라나의 방식 중 후자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가해자의 희망을 말할 시기가 아니다. 미국인의 ‘옳은’ 애국심을 말할 단계는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