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극장을 하야카와라는 사람이 2년 했지. 아마 그 사람이 특무기관에 한자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극장 버스도 있고, 권총도 가지고 있고. 서장들도 꼼짝도 못합디다. 그런데 그때 순사가 극장에 나와서 검열을 했거든. 그러니까 하야카와가 “이것도 예술품인데, 이거를 순사가 나와 검열한다니 이러는 법이 있느냐. 다른 데서 해주시오” 그래서 24년 봄부텀 경찰부 보안과에서 검열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고 몇해 후인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성이 되니까 총독부로 욈겨졌지요.
하야카와가 2년 있다가 동경으로 가버리고. 어느날 이갑성 선생(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이며 당시 명륜동에서 경상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고 있었다.- 필자)께서 나를 찾아오셨어. 아마 그 극장에 자주 오셔서 내가 해설하는 걸 보셨던 모양이야. 오시더니 차상무라는 이 선생 처남이 극장을 해봤으면 한대. 그래 내가 이 선생님을 모시고 조선극장 소유주 니시무라 지점장(당시 조선극장의 소유권은 요코하마 해상보험주식회사 경성지점에 있었고 흥행권은 다른 개인이 갖고 있었다.- 필자)을 찾아갔지. “이분이 3·1운동 때 33인의 한분이시고, 한국 민족으로서는 최고의 분이신데, 이분의 처남이 극장 경영에 생각 있으신 모냥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차상무씨가 조선극장을 1년 하게 됐어요. 1924년이죠. 그때부터 내가 영업담당을 하게 됐지요.
“왜 하필 두만강이냐”
참 일이 많았어. 나운규 <두만강을 건너서> 때도 애먹었습니다. 어느날 나운규씨가 날 찾아왔어요. 단성사하고 사이가 나빠졌는지 조선극장에서 <두만강을 건너서>를 상영하게 해달라고. 그래 내가 “나도 단성사에 적을 두고 신셀 진 적이 있는데, 여기서 그 영화를 상영하면 수입은 여하간에 내 입장이 대단히 곤란합니다.” 며칠 뒤에 찬영회 회원이구 <매일신문> 기자였던 남상일씨가 찾아왔어요. 책임은 자기네가 질 테니 상영하도록 해달라구. 그래 김덕경씨를 찾아가 의논을 해보니 “알아서 하게” 그래서 예고를 하고 시작했지요.
<두만강을 건너서>는 동척회사 때문에 농민들이 곡식도 뺏기고 착취를 당하고 그래 가지구 살 수 없어서, 전부 바가지쪽을 짊어지고는 남부여대 해가지구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가면 잘살 수 있다, 그래서 북간도에 가서 개척을 해가지구 좁쌀이나 심어 가지구 겨울을 나려구. 그런데 마적단이 들어와가지구 말이지, 다 뺏어가구 이가 갈리니까. 여기서 와두 죽게 됐구, 거기 있었을 적에는 먼저 죽었을런지도 모르구, 이왕 죽을 바에는 고향에 가서 죽자. 그래 얼음 깔린 두만강에 오니까 마적단이 또 쫓아와가지구 바가지쪽 뭐 전부다 총질하고 그래 가지구 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피를 흘리구. 두만강을 건너서.
검열을 따러 내가 들어갔는데 그때 총독부 보안과에 오까라는 검열관이 있었습니다. 한국말도 무불통지입니다. 영어도 잘하고. 오까 합쳐서 검열관이 다섯입니다. 영화를 보드니 “나운규가 이거 맨들었다지?” “예, 그렇습니다.” “나운규 좀 오라 그래라.” 연락을 해가지구 나운규씨가 들어왔어요. “너 이 조선총독부를 어떻게 아느냐, 응? 검열관을 빠가로 알아도 분수가 있지, 응? 아니, 식민지 정책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두만강을 건너갔다가, 또다시 죽어버려? 조선통치가 뭔지 아느냐? 개작해가지구 와라. 아가야.” (웃음) 나운규도 아찔한 모양이드구만. (“나운규는 검열관들하고 좀 싸우구 그랬어요?”- 대담중의 이영일 선생) 에이, 그 사람이 무슨 싸웁니까잉∼. 나두 할말 없어 그 자리에서 나왔어. 나운규한테 “어떡할거유?” 그랬더니, “아후∼, (한숨) 모르겠습니다. 하두 뭐라고 하니, 어디다 어떻게 손을 댑니까?”
자, 극장이 큰일 났어. 예고 포스터 붙었는데 극장이 빵꾸가 나게 생겼어. 재수없으면 그 영화도 어요. 할 수 없어서 내가 저녁에 인현동 오까 집을 찾아갔어요. “내일부터 나 조선극장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검열이 안 된다고 하시니, 모레부터 영화가 없습니다. 여기 끝나면 프린트가 전부 지방으로 가니까 재상영할 것도 없습니다. 영업부장으로서 프로를 짜고 선정해 가지고선 극장 문을 닫게 되었으니 관중을 뵐 면목이 없잖습니까? 그동안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니 오락기관인데 문을 닫다니! 그러면 주민들이 갈 데가 없을 테고 치안상 좋지 않다. 나운규는 뭐라 그러드냐?” “흐응∼(콧방귀), 지금 하숙방에서 골치싸고 드러누워서 정신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나는 모양입니다. 지금 돈 댄 전주(錢主)는 망했다고 야단법석이고.”
가만있더니 “여봐, 조선에 강이 몇이야? 두만강 빼고 다른 강을 갖다 집어넣어. 그럼 검열해 주겠다”. “낙동강이나 한강이나 대동강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치면, 조선 안에 마적단이 돌아댕기는 건데 이거 치안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 그러게!” “할 수 없습니다, 선전예고는 해놨는데 제명을 바꾸면 사람이 안 들어옵니다. ‘아마 영화가 잘못 됐나 보다’ 관객이 그럴 테고, ‘전부 캇트 당해서 엉망이로구나’ 할 테고. 망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여기서 <두만강을 건너서> 그대로 하고, 지방은 전부 제명을 바꿔가지고 <사랑을 찾아서>로 흥행을 했습니다.
감옥에 갔지만 양심의 가책 없어
(“춘사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어떤 인물이에요?”- 대담중의 이영일) 성격이 뭐라 그럴까. 좀 우물우물한 편 아니에요? 난 그렇게 봤는데. 직선적이 아닌 것 같애. 사람이 순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이가 얼굴이 좀 얽지 않았습니까?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도리구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하고 댕깁니다. 얼굴 뵈지 않으려고. 배우라고 그러면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댕기거던. 그게 귀찮다 그거야. “본 얼굴을 보여선 인기가 떨어진다” 그러면서. 지나가도 몰라요. 다방에 간다든지 이런 거 없습니다.
그 다음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김영호라고 하는 형사부장 있었습니다. 어떻게 문화인을 못살게 구는지! 웬만한 신문기자, 배우들, 안 불려가서 욕 안 먹은 사람이 없고 발길로 안 차인 사람이 없습니다. 극단이 들어오면 배우들 데리고 오라고 해가지고 안 데려오면 중간에서 막 닫히고. 아주 악질이죠! 좌우간 일본놈 이상이야. “너 이놈의 새끼들, 니가 무슨 예술가고 문화인이냐? 일본경찰이 봐주기 때문에 니가 무대에 올라서 밥술이나 먹지, 그거 못하게 되면 너희가 기운이 있으니 군막 끌 테냐? 돈이 있어 장사를 할 테냐? 거지 깍쟁이밖에 더 되겠느냐?” 이러구 닦달을 쳐. 극단이 들어오면, 극단이 대본에 없는 얘기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세리포(대사- 필자)를 잊어버리는 수도 있고, 배우가 좀 늦게 나오면 임시변통으로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막 내리는 거야.
자주 투서가 들어갑니다. 못살게 군다고 말야. 극장에서도 몇 사람이 “자꾸 투서를 한다면 그놈 쫓겨난다는데.” 나도 분해 견딜 수 있어야지. 경기도 경찰부에다가 무기명으로다가 투서를 했습니다. 내 투서 때문에 이창영이라는 촬영기사하고 극장지배인이 잡혀들어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자수를 했죠. 무고죄로 1년 징역이 나왔습니다.
그때 있던 사람들은 다 알지. 신문에도 나고 그랬으니까. 뻘건 옷을 떡, 쇠사슬을 차고 지나가니 다들 야단났다구. 나를 봉투 붙이는 데를 보냅디다. 내가 들어왔다 그러니 죄수들도 “아이구 동호가 웬일이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장갑도 맨들어주고, 버선도 해서 신겨주고. 말하자면 팬들이지. (웃음) 돌봐주고, 몸 약한데 몸조심하라구 거기 여러 사람들이 그러구. 난 뭐 사기나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양심에 가책되는 거 하나도 없었어요. 부끄러울 것도 없고 말이지. 그게 37년입니다. 나중에 김영호라는 놈 보안과에서 쫓겨나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에 붙들려가고 그랬지.
내추럴 본 변사
38년에 조선극장 불나서 문 닫고 제일극장에 몇년 있다가, 41년에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생겼어요. 제작, 배급을 통제하는 회사가 생긴 거야. 거길 들어갔지. 사무실이 남대문에 있었습니다. 조선영화배급사가 나중엔 조선영화주식회사랑 합쳐서 직원이 한 100명 됐어요. 촬영기사다 뭐다 하는 쓸 만한 사람은 전부 거기 들어와 있었으니깐. 해방돼가지고 일본 사람들이 퇴직금 다 주고, 잔금 정리하고, 그리고 10만원을 냉겨두고 갔어요. 자체 운영하라구. 그래서 그때 대표 이사장을 이제명씨를 시켰고, 나는 업무부장. 그리고 한 1년 하다 이제명씨는 서울영화주식회사를 맨글어 가지고 나갔어요. 내가 대신 이걸 맡아하면서 안석영을 끌어들였습니다.
(긴 사이- 필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는, 내가 극장 생활을 오래 했었는데, 어떻게든지 여러 사람들이 날 도와주고. 인심을 잃질 않아 그랬던지 실직을 해본 일은 한번도 없어요. 실직 한 일은 한번도 없어. 변사할 때도 나는 어떻게 돼 그런지 목이 한번이라도 쉬어본 일이 없어. 계란을 초에다 담가서 먹고. 며칠 쉬다가 목이 터져설라문, 그 담에는 쉬지 않아. 쨍쨍해요. 저 뒤에서까지 다 들려. 절대 천성이에요. 그거 하난 내가 그래도. (웃음)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 최예정/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