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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2001-09-05

서울시네마테크가 연 영화사강의 지상중계

●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그는 왜 5분을 잘랐을까

제1강 - 임재철이 들려주는 <빅슬립> 제작과정

지금 우리가 할리우드영화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감독과 영화들은 60년대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비평문화, 누벨바그의 감독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 발굴되어 가장 높이 평가를 받은 감독이 하워드 혹스예요. 하워드 혹스는 존 포드처럼 아카데미상을 여러 번 받은 적도 없고, 히치콕 같은 스타감독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혹스는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스타일상으로 눈에 띄는 게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혹스도 할리우드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하워드 혹스는 1896년생인데요. 인디애나의 유서깊은 가문 출신의, 말하자면 정통 WASP입니다. 장남이었던 하워드 혹스는 놀기 좋아하는, ‘불량학생’이었답니다. 왜 출신성분 이야기를 하느냐. 할리우드에서 작업할 때 이 사람만큼 출신성분을 잘 활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그는 공부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해서 코넬대학을 졸업했어요. 처음엔 제작을 했다가 몇몇 작품이 실패하니 차라리 내가 해볼까 생각해 감독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1910, 20년대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인종문제입니다. 당시 할리우드는 유대인들이 지배하던 곳이었어요. 영화업은 돈벌이는 됐지만 사회적 천대를 받는 직업이었고, 유대인들은 정통성 있는 산업에 진출할 수가 없으니 영화산업에 진출한 거죠. 미국엔 인종적 서열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본적인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하워드 혹스는 이것을 아주 잘 활용한 사람이에요. 그는 자신이 WASP이고, 아이비리그 출신임을 거래에 활용해서 제작자들과 거래를 유리하게 끌어갔습니다. 혹스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프로듀서 겸 감독으로 계약을 합니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흥행감독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혹스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현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때문에 하워드 혹스 영화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추동력은 프로페셔널리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빅 슬립>에도 나타나지만 그는 한번도 플래시백을 쓴 적이 없어요. 그가 보기에 플래시백, 어떤 캐릭터의 내면을 관객이 알게 해준다는 건 사기라는 거죠. <빅 슬립>은 44년에 촬영에 들어갑니다. 그해는 <이중배상> <머더 마이 스위트> 등 필름누아르의 원형을 갖춘 영화들이 나온 땐데, 주인공 탐정의 플래시백을 보여주고 탐정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혹스는 절대 그런 것을 쓰지 않았어요. <빅 슬립>은 1944년 10월에 촬영에 들어가 1945년 1월에 촬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1946년 9월에 가서야 개봉했어요. 개봉이 이렇게 늦춰진 이유는, 첫째 당시 메이저 영화사들이 전쟁 소재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1945년 초에 이미 종전의 예감이 팽배해 그 영화들을 먼저 개봉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빅 슬립> 이전에 하워드 혹스가 만든 <탈출>(To Have and Have Not, 1944)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 주연이었어요. <탈출>은 <카사블랑카>의 아류작입니다. <탈출>을 만들 때 주연배우로 로렌 바콜을 캐스팅했어요. 로렌 바콜은 모델 출신으로, 당시 19살의 연기경험도 없는 배우였는데 <탈출>에 출연하고 보가트와 로맨스가 생기면서 알려졌습니다. 1944년 10월에 개봉한 <탈출>이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개봉이 밀린 또 한 가지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로렌 바콜이 <탈출> 다음에 출연한 <컨피덴셜 에이전트>란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가 작품도 비판을 받고, 흥행에도 참패했습니다. 게다가 로렌 바콜은 연기가 전혀 안 된다는 평이 났어요.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로렌 바콜이란 귀중한 자산을 어떻게든 되살릴 필요가 있었던 거죠. 이미 <빅 슬립>은 편집까지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때 에이전트 한 사람이 워너브러더스 사장 잭 워너에게 제안을 했죠. 지금 <빅 슬립>을 개봉하면 로렌 바콜의 스타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현재의 편집본보다 로렌 바콜의 비중을 늘리고 몇몇 장면을 재촬영해야 한다, 그것이 로렌 바콜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잭 워너는 그 말을 받아들여 혹스에게 다시 찍어 편집해달라 부탁을 하죠.

사람들은 ‘<빅 슬립>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누가 누구를 죽였단 말이야,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원래 편집본에는 미스터리 플롯이 모두 해결됩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찍다보니 시간이 길어져 불필요한 부분을 자르면서,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주인공 필립 말로가 지방 검사에게 설명하는 5분을 들어냈습니다. 그 장면이 빠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혹스는 “영화라는 건 관객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5개의 멋진 장면만 있으면 된다”라고 뻔뻔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혹스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명쾌하게 이해시켜주는 감독인데, <빅 슬립>만 예외입니다. 할리우드영화를 볼 때는 시스템과 작가를 아울러서 봐야 하는데, <빅 슬립>은 작가라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당시 사회 역사적 시스템, 로렌 바콜이라는 스타를 살려줘야 한다는 고려 등 넓은 의미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위정훈 기자

▶ 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 제1강

▶ 회화성과 음악으로 빚어낸 영상리듬 - 제2강

▶ 영화사를 뒤흔든 걸작, 그 작용과 반작용 - 제3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