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의 엔딩을 장식한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라는 타이틀은 ‘완벽주의자’ 김성수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4억원이 넘는 제작비와 1년 반에 걸친 음반작업은 시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초대형 프로젝트. 게다가 김성수 감독은 음악작업 내내 “<무사>에 연연하지 말라”는 혼란스러운 주문까지 해댔다.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시작한 ‘역사공부’도 중단시킨 감독은 대신 여솔의 캐릭터보드를 여러 장 보여주었다. 고려시대 노비의 것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무국적에 가까운 의상과 액세서리들.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나 피어싱을 한 귀, 모피 숄과 특이한 마소재의 옷감 등을 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감독의 의도가 팍하고 꽂힌다. ‘감독이 원하는 건 딱히 동양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음악이구나’ 하고.
<무사>의 첫 장면은 고려 무사들의 사막 횡단신이다. 원래대로라면 영화 중반에 나올 장면. 감독이 편집과정에서 맘을 바꿔 맨 앞으로 뺀 것이다. 애초에 오프닝 음악을 생각지 않았던 사기스도 동시에 바빠졌다. 영화의 이미지를 최초로 각인시키는 첫 음악이니만큼 대충 화면만 보고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느끼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적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 뜨거운 사막의 열풍을 맛본 다음 날 그의 머리 속에는 절로 <죽음의 바람>(Death Wind-Prologue 2:00)이 춤을 춘다.
대충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마치자 그에게 남은 과제는 포인트가 될 악기를 고르는 것이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중국 명조(明朝)의 고전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서를 간직한 악기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한국의 사물놀이를 기억해냈지만 소리가 너무 튀어 포기하고, 좀더 섬세한 음색이면서도 관객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소리를 찾던 중 피리와 장구를 만난다. 피리는 그 애절한 소리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장면에, 장구는 빠른 리듬의 전투신에 주로 쓰이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여솔과 최정이 대립하는 장면에서 머리가 쭈삣 서도록 날카로운 고음으로 울던 피리는 다름아닌 일본의 전통가면극 ‘노’(能)에 쓰이는 대나무피리 다케부에. 그 밖에 몽고군의 습격신과 주진군의 숲속 전투신 등에 한국과 일본의 장구와 브라질의 전기드럼을 썼다.
작업을 마치고 그가 받은 돈은 2억원. 보통 한국에서 A급에 해당하는 음악감독들이 받는 액수가 5천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파격적인 액수다. 그러나 사기스 자신에게는 오히려 적자의 계산법이다. 작업료의 두배를 ‘지출’한 심정을 물으니, “처음엔 물론 계획을 세우고 돈을 썼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려다보니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신이 음악감독이라면 어떤 길을 택하겠는가?” 하고 오히려 반문. 그는 현재 자신의 20년 음악활동을 결산하는 기념앨범 <Song Book `79-99`>를 제작중이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사기스 시로의 프로필
1957년생
79년 일본 퓨전그룹 T-Square의 멤버로 데뷔, 이후 4매의 앨범작업에 참여
80∼89년 앨범 <EYES>에서 솔로 데뷔, 이후 3매의 앨범을 발매, 영국가수 John Stanley와 그룹 Blend 결성
90∼99년 영국 R&B 프로듀서 Martin Lascelles와 그룹 Mash 결성, Ro-Jam 레벨을 결성
97년 7월 오차드홀에서 5일간 ‘에반게리온 교향악’ 주관, 8월 Loren&Mash 싱글 <Thanatos> 오리콘 2위
12월 Loren&Mash+UK <Evangelion-Vox> 오리콘 10위
98년 4월 Ro-Jam의 집대성 앨범 <Loren, Mash, Hazel, Desire> 발표
11월 MISIA <The Glory Day> 프로듀스, 12월 <Evangelion S2 works by Shiro Sagisu> CD 판매
현재 20주년 기념앨범 <Song Book ‘79-99’> 제작중
TV 영화 <변덕스런 오렌지 로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신세기 에반게리온> <기동전사 간담> <비밀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