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70년의 시간여행, <고래와 창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이 대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나에게로 다가온 것이라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나의 의지가 대상을 탐구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묘한 인력이 나를 끌어당긴 거라고, 그러므로 그것과 나의 조우는 운명이었다고. <오피셜 스토리>로 잘 알려진 루이스 푸엔조의 새 영화 <고래와 창녀>는 팩션(faction) 작가 베라(아이타나 산체스 기요)가 7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흑백 사진 속의 로라(메세 로렌스)에게 그런 식의 인력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베라는 자신과 닮아 보이는 로라의 흑백 누드 사진과 그의 애인이었던 에밀리오(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가 쓴 편지와 일기를 보며, 그녀의 삶으로 빠져든다. 이후 신기하게도 로라와 관련된 인물들이 하나둘씩 베라의 삶으로 침입한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로라와 에밀리오의 이야기를 사진집으로 펴내기로 한 그녀는 아주 파편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로라의 삶(fact)의 빈틈을 자신의 상상(fiction)으로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 허구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로라와의 영적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늘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정열적인 소녀 로라는 사진작가인 애인 에밀리오와 함께 파타고니아 해변가에 도착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더 아름다운 사랑을 기대했던 로라와 달리 에밀리오는 탱고 작곡가이자 포주인 수와레즈에게 그녀를 팔아버린다. 사랑만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었던 로라는 애인의 배신 이후 마치 해변으로 잘못 밀려온 고래와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1930년대 조수에 잘못 밀려왔던 그 고래는 70년 뒤 베라 앞에 다시 나타나고, 고래의 슬픈 눈빛에 담긴 로라의 깊은 외로움은 그녀의 삶을 좇는 베라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7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로라와 베라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파타고니아 해변을 비행 촬영한 시네마스코프 화면과 정열과 슬픔을 동시에 담고 있어 더 매력적인 탱고 선율을 배경으로 관객에게 시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창녀’와 ‘고래’라는 두개의 모티브가 다소 상투적 수준에서 해석되고 있으며, 둘의 조합이 매우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말로는 이해도, 용서도 될 수 없는 에밀리오의 행태를 에밀리오와 베라, 두 인물의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함으로써 화합시키려 하지만 끊임없는 내레이션은 지루함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우리를 로라에게 안내하는 베라의 외로움은 그 근원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 70년의 시간여행에 몰입되는 것을 자꾸 방해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