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최후의 전쟁>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매그니토를 보고는 여자친구에게 “간달프 할아버지야”라고 속삭였다. <엑스맨> 시리즈의 매그니토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간달프가 같은 배우에 의해 거의 시차없이 연기되면서도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안 매켈런이 아니었다면, 선악동체의 강렬한 연기력을 가진 그가 아니었다면 퍽 우습고 눈에 거슬리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연기력은 어디서 왔을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를 낚아채기 전, 그는 영국에서 어떤 연기를 해왔을까. 틈만 나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가 할리우드에 대해 갖는 생각은 어떤 것일까. 이안 매켈런의 수많은 인터뷰들, 그리고 그의 영화 출연작들을 중심으로 코미디언 뺨치는 유머감각을 지닌 영국 게이 할아버지를 조금 더 알아보았다.
“지고한 선의 상징과 순수한 악의 화신을 똑같은 위엄으로 연기하는 배우.” 올 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다빈치 코드> 기자회견에서 이안 매켈런을 소개하는 데는 여러 말이 필요없었다. 이안 매켈런은 늦게, 분명 너무 뒤늦게 할리우드에 ‘발견’된 배우다. 연기력이 뛰어난 이 배우는 갑작스럽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3부작과 <엑스맨> 3부작을 통해 세계 영화팬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사실 그의 연기생활에서 이 대작영화들은 아주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에서 오랜 시간을 연극배우로 활동한 그는 예술 공헌을 이유로 기사 작위를 받았고, 로렌스 올리비에의 뒤를 잇는 최고의 셰익스피어 배우로 알려져 있다. 지난 5월28일 68살이 된 그가 세계를 무대로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영국에서의 활동에 있다.
종이인형으로 셰익스피어를 연출하던 소년
이안 매켈런은 1939년 잉글랜드 북쪽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린 이안은 폭격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는 테이블 아래서 잠을 자야 했다. 탄광촌 위건은 큰 폭격에 시달리지 않는 도시였으니, 그가 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탕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부모 덕에 아주 일찍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본 공연인 <피터팬>은 “진짜 악어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다 와이어도 다 보여서” 실망스러웠지만, 여덟살 때 산타클로스에게서 받은 장난감 극장 세트로 셰익스피어를 연출할 정도의 관심을 끄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참고한 원작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 <햄릿>이었다. 당연하게도, 진 시몬스의 오필리아도,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도 모두 종이로 오려 만든 인형으로 혼자 해결했다. 죽을 때까지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연출가로, 제작자로 활동했던 그의 누나 진은 동생 이안을 셰익스피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13살 때, <십이야>에 처음 출연한 뒤 매년 여름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본에서 있었던 여름학교는 그에게 진짜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여름학교가 열리던 곳에서 30분이면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에 갈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어린 이안은 로렌스 올리비에, 비비안 리, 에디스 에반스, 페기 애시크로프트가 출연하는 셰익스피어극을 볼 수 있었다. “페기 애시크로프트의 연기는 인간 이상의 것이었다. 나같은 아마추어가 그런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십대의 나는 요리사나 기자가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 다니게 되었지만, 재학 중에 21편의 연극에 출연하면서 장학금 혜택은 하나씩 사라져갔다. 예술 학사 학위를 1961년에 취득했지만 평점은 2.2에 머물렀다. “다른 일은 맞지 않아서” 그는 착실히 연기 경력을 쌓아갔다. 연기 학교를 따로 다니지는 않았다. 보고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런던으로 이사해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 매켈런의 동료들은 이미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족이나 언론 모두 내 성 정체성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알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운명의 여인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거짓말로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착실히 연기를 했다. 60년대 후반, 그는 에든버러와 런던에서 리처드 2세와 에드워드 2세를 동시에 연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합류, 전성기의 시작
29살이던 1969년이 되자 그는 <가디언>으로부터 “위대한 배우가 될 연기자를 언급할 때, 이안 매켈런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는 논평을 들었다. 매기 스미스는 매켈런의 런던 웨스트엔드 데뷔 무대에 크게 감동받아 로렌스 올리비에게 매켈런의 공연을 보라고 추천했다. 그의 연기를 본 올리비에는 국립연극컴퍼니를 설립한 뒤 매켈런을 불러들였다. 그의 목표는 이미 “연극 무대를 떠나지 않고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다. 영화 일을 시작하기에 연극만으로 너무 바쁘지만 않았으면 좀더 일찍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1975년에 로열 세익스피어 컴퍼니에 들어갔는데, 예술감독 트레버 넌을 만나면서 명실상부한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76년 매켈런이 공연한 <맥베스>는 로렌스 올리비에 이후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선데이 텔레그래프>(텔레그래프??)는 “위대하고 잊을 수 없는 연기”라고 평했다. 주디 덴치는 “매켈런과는 언제라도 함께 공연하고 싶다. 그는 대단히 지적이며 역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놀라운 유머감각을 지녔다”라고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맥베스>의 전설적인 성공을 통해 매켈런은 완전히 입지를 굳혔다. 넌과 매켈런의 협력은 1989년 <오델로>까지 이어지는데, 매켈런은 이아고 연기로 76년의 <맥베스>에 이어 다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두 작품은 비디오로 녹화되어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그 즈음부터 매켈런은 영국배우협회 이사, 말로 협회장, 로열 내셔널 시어터 기금 모금 위원장 등 온갖 직책을 맡아 수행해왔다. 노팅엄, 리즈, 옥스퍼드, 애버딘대학 등에서 강의도 했다. 그가 받은 연기상과 담당한 공적인 직책 목록만 해도 A4용지 2장을 훌쩍 넘긴다. 그리고 1988년의 커밍아웃이 있었다. 마거릿 대처 정부가 ‘섹션 28’ 입법으로 동성애의 공론화를 범죄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매켈런은 <BBC>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커밍아웃을 했다. 이후 게이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인권단체 스톤월을 공동 설립했다. 커밍아웃을 한 뒤 매켈런에 대한 화제는 당연하게도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집중되었다. “내가 게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가 게이일 뿐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을 신문에 투고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커밍아웃, 커밍아웃, 커밍아웃. 내가 한 건 그것뿐이다. 묘비에다가 써넣기라도 해야겠군.” 2003년, 매켈런은 “올랜도 블룸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농담을 했다.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블룸이 “나는 게이가 아니다. 난 여자친구가 있다”고 반응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매켈런이 보기에 이런 민감한 반응은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들이 단지 농담의 대상으로라도 게이문제에 얽히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동성애 혐오증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이성애자인 남성이라 해도 매력적이라면 연인으로 상상해보는 건 자유니까. “내가 게이라는 걸 알고서도 나를 연인으로 상상하는 여자들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갓 앤 몬스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90년, 매켈런은 예술 공헌도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때부터 연극 작품을 각색해 영화화하거나 영화에 출연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별의 여섯 단계>(1993)에 윌 스미스와 함께 출연한 것도, <섀도우>(1994)에 알렉 볼드윈과 출연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무엇보다 직접 각본, 주연, 제작을 겸한 <리처드 3세>(1995)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엑스맨> 1, 2편을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를 만난 것은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1998)을 통해서였다. 싱어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의 캐스팅을 위해 매켈런을 만난 자리에서, 그가 늙은 나치 역을 연기하기엔 너무 젊어 보인다고 털어놓았다. 싱어는 <콜드 컴포트 팜>이라는 영화에서 목사로 나온 배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는데, 매켈런은 자신이 바로 그 배우라는 사실을 밝혔다. 싱어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매켈런을 캐스팅했다. <엑스맨> 시리즈는 물론이고.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에서 매켈런은 나치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미국으로 이민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커트 두샌더를 연기했다. 잊혀진 것 같던 과거가 이웃 소년의 집요한 호기심으로 하나씩 되살아나면서 영화는 점점 긴박한 심리스릴러로 옥죄어간다. 평가절하받은 싱어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에서, 매켈런은 평범하고 인자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은 사악한, 그리고 전쟁에 의해 파괴된 영혼의 뒷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냈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갓 앤 몬스터>는 매켈런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투명인간> 등을 만들어 30년대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추앙받았던, 너무 이른 시기에 커밍아웃한 게이로 살았던 제임스 웨일의 이야기를 다룬 <갓 앤 몬스터>에서 매켈런은 웨일의 도플갱어 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웨일은 전쟁터에서 만난 첫사랑의 죽음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곱씹으며 공포영화들을 잇따라 만들었다. 악몽을 팔아, 영혼을 팔아 그 자신이 괴물이 되면서. 매켈런은 인간의 내면에 끔찍하게 남은 전쟁의 상흔을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에서보다 깊고 선명하게 연기했다. 그때부터 전세계가 알고 있는 그의 필모그래피가 이어졌다. <엑스맨> 대본을 읽기 전까지 가장 최근에 읽은 코믹스라고는 35년전에 읽은 것뿐이었지만. <엑스맨>의 악의 축(영화를 보면 ‘정상인’들이야말로 악의 축이지만) 매그니토를 수락한 이유는 간단했다. 브라이언 싱어, 그리고 “악의 화신으로 말하면 나는 이미 연극 무대에서 위대한 악의 제왕들을 연기한 바 있다. 리처드 3세가 그랬고, <오셀로>의 이아고가 그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매그니토가 악당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옳다는 확신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나는 내가 연기하는 인물들을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