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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와 씨팍>의 매력과 가능성 [1]
김도훈 2006-07-05

18금(禁) 엽기 하이브리드 포스트모던 장편 활극 애니메이션, 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치와 씨팍>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정의하는 것은 도대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치와 씨팍>을 숫자로 정의 내려보자. 기획부터 개봉까지 걸린 시간 8년. 셀 매수 10만장 이상. 컷 수 2100. 제작에 참여한 스탭 수 150여명(고정 스탭 40명). 총제작비 35억원. 이 모든 숫자들은 <아치와 씨팍>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강도의 노동력과 어떤 강도의 고난을 겪어야만 했는지 아주 제대로 보여준다. 엄청난 셀 매수와 컷 수. 그러나 고정된 스탭의 수. 적은 제작비와 기나긴 세월을 집어삼킨 제작기간까지. <아치와 씨팍>은 제작진마저도 가끔은 완성을 장담하지 못했던 애니메이션이다. 마침내 8년의 제작기간을 마무리하고 완성된 <아치와 씨팍>의 전모를 살펴본다.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다. <아치와 씨팍>는 주요 배경 지식을 관객에게 기다란 자막으로 보여주면서 막을 올린다. 이를테면 이런 의미다. 우리는 요런 컨셉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설명이 끝나는 순간부터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마치 <스타워즈>의 시작처럼 장황하게 시작되는 서두는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진중하게 읊는 성우의 목소리 덕에 시작부터 키득거리게 만든다. 인간의 배설물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미래의 도시. 정부는 유일한 에너지원의 생산을 촉진시키기 위해 중독성 강한 마약 ‘하드’를 배설량에 비례해 나누어준다. 이를테면 화장실에서 똥을 싸면 컴퓨터가 그것을 감지하고 구식 전송 장치를 통해 하드를 배설자에게 공급해주는 방식이다. 한편 하드의 부작용으로 배설 능력을 상실한 채 하드만을 약탈하는 보자기 갱단이 생겨나 도시의 근교를 어지럽히고, 전체주의 군사정부는 이들을 잡기위해 합성 인간인 형사 게코를 투입한다. 여기에 주인공인 아치와 씨팍이 있다. 말 그대로 씨팍새 같은 양아치 듀오는 공중화장실에서 강탈한 하드를 거래하며 하루하루 먹고 살아간다. 똥을 자원으로 삼는 도시와 하드의 부작용으로 돌연변이가 된 보자기 갱단, 거기에 얽혀드는 하드 밀매 양아치들의 모험담이라니. <아치와 씨팍>은 갑자기 어느 별에서 한국 애니메이션계로 던져보낸 돌연변이 갱단처럼 보일 지경이다. 대체 이 난감한 악동들의 태생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세기말 키치의 감수성으로 등장

<아치와 씨팍>의 기획이 시작되었던 8년 전. 세기말의 문화계를 사로잡은 코드는 ‘키치’(kitch)였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엽기’의 유행이 막을 올렸다. 고전적인 대중만화의 작풍과 관습을 파괴하는 문화상품들이 인기를 모았고, <이나중 탁구부>나 <멋지다 마사루>, 혹은 <비비스와 버트헤드>나 <사우스 파크>처럼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웃을 수조차 없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선보인 <아치와 씨팍>이 열광적인 인기를 모았던 것도 세기말적인 키치 열풍의 유행과 관계가 있었다. 배설물과 욕과 피의 향연에 유독 열광하던 젊은 관객은 극장으로 나들이를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치와 씨팍>의 맹점 또한 거기에 있다. 기획으로부터 개봉까지 8년의 세월이 흘렀다. 키치 문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냉큼 사그라들었고, 세기말의 화끈한 문화적 발랄함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아치와 씨팍>의 제작을 꿈꾸었던 시기는 바로 그런 하위문화가 인기를 얻었던 세기말이다. 지금 와서 그런 요소들을 감추고 갈 수는 없다.” 김선구 PD의 말처럼 제작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첫 모니터 시사의 반응이 조금 싸늘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영화의 기술력은 훌륭하지만 왠지 좀 불편하다는 평들이 터져나왔다. 제작진은 고심 끝에 관객의 심려를 지나치게 끼치는 대사와 상황들을 조금 바꾸었다. 김선구 PD의 말대로 “대중적인 자기 거세”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컬트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를 바라는 제작진의 강한 의지이기도 했다. 상업영화로서의 기술적인 완성도로 승부를 보지 않는다면 이미 8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지쳐 떨어진 팬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수작업을 통한 2D와 3D의 능숙한 결합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치와 씨팍>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적은 35억원의 제작비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유려하다. <아치와 씨팍>이 기념비적인 기술적 시도를 행한 작품이라고 굳이 상찬할 필요는 없다. 3D로 만든 배경에 2D 캐릭터를 입혀내는 작업은 이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 되었다. 그러나 <아치와 씨팍>은 움직이는 캐릭터마저 3D의 도움을 받아서 창조하는 최근의 애니메이션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일단 모든 배경의 기본 골자는 3D로 만들어졌다. 제작진은 영화 속에 등장할 공간을 마치 세트를 짓는 것처럼 만들었고, 그 속에서 스토리보드에 따라 카메라감독이 카메라를 움직여 배경을 잡아 장면의 연출을 궁리했다. 그러고는 3D로 완성한 배경을 일일이 2D로 색칠작업을 한 뒤, 거기에 맞추어서 2D 캐릭터를 붙여넣었다. “결국은 노가다다. 한국식 노가다”라는 김선구 PD의 말처럼, 이는 엄청난 노동량을 요하는 수작업의 결과물이다. 총매수만 10만장이 넘고 총컷 수가 2100컷이 넘는다. 이 무시무시한 수작업의 결과는 더할 나위가 없다. 카메라는 극영화에서처럼 다양한 영화적 앵글로 움직이지만 3D 공간의 인공적인 느낌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3D의 도움을 받지 않은 완벽한 2D 캐릭터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정제된 3D 화면의 극영화적인 움직임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드림웍스나 디즈니가 3D 캐릭터의 몸을 2D처럼 해방시키기 위해 ‘스트래치 앤드 스쿼시’(Stretch & Squash) 기술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3D 캐릭터들은 2D 캐릭터의 자유로운 몸놀림을 완벽하게 따르지 못한다. 여전히 셀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창조적 예술품의 가장 자유분방한 도구이며, <아치와 씨팍>은 그 사이에서 능숙한 줄타기를 해낸다.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액션

기술적으로 숙련된 완성도가 가져다준 선물은 크다. <아치와 씨팍>이 단순히 마니아를 대상으로 한 엽기적 난장 영화로 나자빠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작진은 기술적인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을 토대로 장르적인 쾌감을 추진하는 액션장면들을 <아치와 씨팍>의 전면에 내세웠다. 모두 5개의 거대한 액션 스테이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롤러코스터와도 같다. 게다가 각각의 액션 시퀀스들이 다양한 영화들에서 빌려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매드맥스2>를 떠올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고속도로 체이스 장면,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장면을 빌려온 계단에서의 결투장면, 그리고 <인디아나 존스2>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하갱도 장면 등. 조범진 감독은 그저 훔쳐왔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원래 우리의 컨셉이 다른 것들 좀 따라하자는 거였다. 가진 게 없으니 여기저기서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나. (웃음) 레퍼런스가 한 300개는 숨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나 무례한 도용은 없다. 대부분의 오마주들은 영화의 설정만을 가져와서 창조적으로 다시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를테면 일신파와 보자기 갱단과 경찰들의 총격전에 아치 일당이 말려드는 호텔 액션장면은 90년대 말에 쏟아져나온 갱스터영화들의 관습을 절묘하게 재창조해낸 것이다. 영화광들을 위한 자그마한 팁도 곳곳에 숨어 있다. 총격신 이후 빌딩 밖으로 떨어진 주인공들 다음 장면에서는 간판에 “진낭만주점”이라는 말이 슬쩍 지나간다. 조범진 감독에 따르면 이는 <트루 로맨스>의 오마주다. “진낭만(眞浪漫)을 영어로 풀이하면 트루 로맨스(True Romance) 아닌가. 아는 사람만 재미있으라고 만들어 넣었다.”

하지만 수많은 인용와 좋은 기술력으로 창조된 액션장면들은 동시에 <아치와 씨팍>의 맹점이기도 하다. 게임 스테이지처럼 이어지는 연속 액션장면들은 속도와 강도에서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는 극대치에 달해 있는 느낌이지만, 그 때문에 액션장면들의 다리가 되어야 하는 드라마가 종종 압사당한다. 김선구 PD 역시 “결론적으로는 액션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하다보니 자아도취에 빠져버렸다. 재미있는 액션장면들을 짜놓고 보니까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은 거다. 하다보니 정말 마음에 들고 고무되어 흠뻑 취해서 빠져든 거다. 너무 많이 해버린 셈이다.”

무신경한 듯 숨겨진 정치적 조롱

감독이 그렇게도 강조하듯이, <아치와 씨팍>이 굳이 어떤 사회적 비판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냥 ‘재미있으라고 한 것’이라며 지나치기에는 못내 아쉬운 의도가 숨겨진 캐릭터들이 있다. 이를테면, 스머프를 닮은 보자기 갱단과 브라이스 인형을 빼닮은 정보국 국장의 캐릭터는 소년, 소녀적 취향에 대한 조롱어린 뒤집기에 가깝게 느껴진다. 김선구 PD 역시 “귀여운 캐릭터에 대한 총질이자, 대량복제 캐릭터 상품에 대한 총질”이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우리는 루저가 아니라 역사의 창조자다!”라며 갱단을 선동하는 보자기 킹 역시 의미심장한 캐릭터다. 그와 갱단이 살아가는 은거지에는 가히 사이비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나는 성화들이 그려져 있고, 2차대전의 프로파간다 전쟁 포스터가 그들의 활약에 몽타주로 삽입되기도 하고, 또한 보자기 킹은 붉은 꽃을 흔드는 갱단의 환호를 받는 위대한 영도자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신해철이라는 사람의 총체적인 이미지와 결합되어 어떤 시너지를 불러일으키는 면도 있다. 사실 <아치와 씨팍>이라는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인간에게 노동은 더이상 필요없는 사회. 생리현상 자체가 생산활동으로 이어지는 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층과 양아치와 소외된 자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회가 <아치와 씨팍>의 세계다. 사실 이는 매우 기초적인 디스토피아 영화의 요소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액션영화로서 <아치와 씨팍>의 숨을 죽이지도 않는다. <아치와 씨팍>의 정치적 비꼼은, 이를테면 과거 민주정의당(현재의 한나라당)의 마크를 그대로 본떠서 만들어진 정보국의 마크처럼 무신경하게 숨겨져 있다. “세상에 누가 그걸 알아차리겠나”라는 조범진 감독의 말처럼, <아치와 씨팍>의 가벼운 정치적 조롱은 ‘할 말은 알아서들 캐치하고 그냥 즐기라’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조롱과 배설 이면의 집념과 고민들

<아치와 씨팍>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어떤 구원병이 될 것이라는 애니메이션계 안팎의 기대는 여전하다. 하나 <아치와 씨팍>은 오히려 한국 애니메이션의 유쾌한 사생아에 가깝다. 아치와 씨팍에게 아버지는 없으며 어머니도 없다. 조범진 감독과 김선구 PD가 입을 모아서 설명하듯이 <아치와 씨팍>은 한번 새끈하게 놀아보자는 유희정신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물론 그들의 못 말리는 유희정신이 대책없이 낭만적인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무려 8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아치와 씨팍>은 숨이 답답해질 정도의 기술적인 수작업과 집념으로 만들어진 장인의 세공품이며, 불유쾌하고 막 나가는 조롱과 배설의 판타지 뒤에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스펙트럼을 이전에 없었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제작진의 고민이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양아치들의 발칙한 모험담에 동의할 수 없는 관객도 있을 것이고, 못내 사랑하길 꺼리는 관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한국 축구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강팀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폭발력이 생기고, 그게 점점 쌓여간다”는 김선구 PD의 말처럼, <아치와 씨팍>이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 기량의 16강 직전에 도달해 있음은 분명하다. 이제 8년의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다.

거칠고 절묘한 안성맞춤의 목소리들

<아치와 씨팍>의 비전문 성우들

<아치와 씨팍>의 사운드트랙은 거칠게 달려가는 영화만큼이나 흔쾌하게 거친 맛이 있다. 이는 최근 애니메이션계의 경향에 맞춰 과감하게 비전문 성우의 목소리를 빌려온 제작진의 시도 덕이다. 주인공인 아치와 씨팍의 목소리는 류승범과 임창정이 맡았고, 이쁜이는 ‘이보다 더 캐릭터와 어울릴 수 없는’ 현영의 성대를 빌려 탄생했다. 현영만큼이나 캐릭터에 절묘한 맛을 심어준 성우는 어둠의 제왕 ‘보자기 킹’의 목소리를 담당한 록의 마왕 신해철. 그외에도 멀더와 스컬리로 잘 알려진 성우 이규화와 서혜정이 정부국 국장과 부국장을 연기하고, 일신파 두목을 비롯한 동네 갱들의 목소리는 인터넷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집단 ‘오인용’이 맡고 있다. 사실 김선구 PD는 “오인용의 기용으로 인해 영화가 너무 플래시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초에 내정되었던 전문 성우들의 목소리는 영화가 의도하는 양아치의 느낌을 잘 살려주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막판에 기용된 오인용이 영화의 유머를 살려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극중 “당신의 항문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배변 촉구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대사는 특별출연한 이경규의 목소리. 이처럼 다양한 성우진의 출연은 재미있지만 가끔식 화면과 대사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드러나기도 한다. 조범진 감독은 성우 기용 문제를 제작 초기에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고한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미리 성우를 캐스팅하는 게 필요하다. 더빙을 잘해야 영화가 살아난다. 애니메이션이 무조건 그림의 힘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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