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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슈퍼맨의 비애

<수퍼맨 리턴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리얼리즘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으로 유배를 갔던 남자가 갑자기 집안에 나타나자 당황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내는 놀라 일어서고 아이들은 초라한 몰골의 사내를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여인은 남편이 유배를 떠난 뒤에 새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갑작스러운 남편의 등장에 기뻐하기보다 난감해하는 것이리라. <수퍼맨 리턴즈>의 설정은 어쩌면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5년 전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던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로이스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로이스의 옆엔 남편과 아들이 있고 로이스는 “왜 우리는 더이상 슈퍼맨이 필요없는가”라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을 예정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슈퍼맨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어 돌아온다. <수퍼맨 리턴즈>가 주목하는 것이 ‘슈퍼맨의 비애’일 것이란 예고이다.

<수퍼맨 리턴즈>는 슈퍼맨의 비애를 슈퍼맨의 수고를 통해 그려가는 영화다. 만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대목이며 1978년 리처드 도너의 영화에서도 담기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슈퍼맨의 수고를 정밀하게 포착하는 장면들이다. 막대한 제작비와 첨단기술이 아니라면 슈퍼맨의 안간힘을 지금처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슈퍼맨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추락하는 비행기를 멈춰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슈퍼맨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수퍼맨 리턴즈>가 비교적 물리법칙에 충실한 이유도 슈퍼맨의 노고에 주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추락하는 비행기의 가속도와 무게를 실감나게 표현할수록 슈퍼맨이 비행기 추락을 막느라 얼마나 힘든지가 절절히 드러나는 식이다. 영화에서 렉스 루더는 슈퍼맨을 신이라고 부르며 자신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을 이롭게 하는 프로메테우스라 칭한다. <수퍼맨 리턴즈>가 참조한 신화가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대목이다. 렉스 루더의 말엔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슈퍼맨이 인류를 구하러 온 신의 아들(예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슈퍼맨은 신인 동시에 프로메테우스다. 창공을 날아올라 지구를 내려다보는 슈퍼맨의 귀엔 인류가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그는 소임을 다하고자 죽을힘을 다해 날고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모습이자 독수리에게 간을 내어준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다. <수퍼맨 리턴즈>는 그렇게 죽을힘을 다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끌어낸다. 그건 불가능에 도전하는 축구대표팀의 투혼에 울고 웃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이다. 기적은 그렇게 이뤄진다.

슈퍼맨은 오랫동안 손쉬운 비난의 대상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이자 보수적 백인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며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슈퍼맨은 선악 구분이 너무 뚜렷한 세계의 영웅이었다. <수퍼맨 리턴즈>도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는 영화는 아니다. 악당이라고 모두 렉스 루더처럼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자들인 것도 아니고 슈퍼맨이라고 선과 악을 늘 무 자르듯 잘라 선의 편에만 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퍼맨 리턴즈>의 슈퍼맨을 보고 있노라면 비판에 앞서 슈퍼맨의 애처로운 처지를 동정하게 된다. <엑스맨>이 그랬던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는 특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안다. 놀라운 시각효과들도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써야 한다는 점도. 논쟁의 여지가 많겠지만 나는 <수퍼맨 리턴즈>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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