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칼로프씨”로 시작된 오스트리아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3월29일자 서신. 수신자는 하네케 감독에게 모스크바 심사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제안했던 러시아 영화계의 대부 니콜라이 미칼로프였다. “저를 초청해주신 데 대해 매우 감사를 드립니다. 혼쾌히 초청을 수락하겠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미칼로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모스크바영화제는 국제 영화계의 거성으로 떠오른 슈퍼스타 하네케 감독이 올해의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사방팔방에 알렸다. 하네케의 요청에 따라, 또는 그의 구미에 맞춰 프랑스 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영국 여배우 줄리 크리스티도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난 6월7일, 영화제 개막을 2주 남겨놓은 시점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온 하네케 감독의 서신은 모스크바영화제 집행위에는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저는 영화제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작의 사전작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네케 감독은 불참 통보에 이어 “여러분들도 영화인인 만큼, 감독에게는 신작 촬영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이해해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러시아 영화인들의 반응은 하네케의 예상과 달리 만만치 않았다. 감독에게는 작품이 우선이고 아니고를 떠나, 아예 그의 태도를 이해해보려는 의사 자체가 없어 보인다. 하네케가 원하는 대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하고, 그의 회고전까지 개최하기 위해 영화 프린트에 러시아어 자막을 붙이는 지난한 작업까지 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블레트야로프 집행위원장은 하네케의 이런 태도를 러시아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하네케의 위원장직 거절은 무척 불명예스러운 치욕으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이해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고 분노하고 있다.
올해로 48회를 맞는 모스크바영화제 역사뿐만 아니라, A급 국제영화제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하네케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는 없었다. 물론 2001년 조디 포스터가 <패닉룸> 촬영 때문에 일단 수락했던 칸영화제 심사위원직을 사양한 바 있지만, 적어도 불참 통보 당시 영화제 개막까지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네케가 도저히 미룰 수 없다는 신작은 <퍼니 게임>이다. 그는 9월11일부터 뉴욕에서 자신의 1997년 작품의 리메이크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휴가를 떠난 평범한 가족이 괴한 두명에게 테러를 당하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킹콩의 손안에서 시달리던 나오미 왓츠로 결정되었다. 하네케가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결례를 범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가 있다. 왓츠의 쉴틈없이 빽빽한 일정으로 인하여 촬영을 서두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왓츠는 11월부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사이코스릴러 <이스턴 프로미시즈>에 이미 예약된 몸이라고 하는데, 우연히도 그녀의 배역은 ‘러시아’ 출신 산파라고 한다.
모스크바는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며 새로운 심사위원장을 물색 중인데, 배우 줄리 크리스티가 선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위원장이 대체되는 것이야 그리 무리가 없겠지만, 문제는 러시아 영화인들의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의 상처다. 심지어 영화제 관련자들의 입에서는 “칸이나 베를린이었다면 신작이 아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겠느냐”는 비판이 새어나오고 있다. 하네케 감독, 한동안 러시아에 발들여놓기 힘들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