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길모퉁이에서 로큰롤과 맞닥뜨리면 깜짝 놀라잖아. 보통은 그럴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맞닥뜨렸어. 위험한 거지.” 고만고만한 연애담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던 일본 소설들 사이에서 이사카 고타로의 책을 만나는 즐거움은 <사신 치바>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찔함을 동반한다. 이사카 고타로는 <칠드런> 한권만 국내에 소개된 작가지만, 무려 네 차례나 나오키상에서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탓인지 <러시 라이프>(2002), <중력 삐에로>(2003), <사신 치바>(2005)가 각기 다른 출판사의 이름을 업고 일시에 출간되었다.
<러시 라이프>는 도시의 현실과 도시의 전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표지 그림인 M. C. 에셔의 ‘상승과 하강’과 똑 닮은 구조로 처음과 끝이 연결되고 각 인물들의 상승과 하강이 역전된다. 무대는 일본 센다이(작가가 살고 있는 곳이다). 연쇄토막살인사건으로 뒤숭숭한 이 도시에는 실직한 뒤 가족에게 버림받은 도요타와 아버지의 자살 뒤 신흥종교에 투신한 가와라자키, 능숙한 빈집털이범 구로사와, 애인의 아내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교코 등이 살고 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영화 <숏컷>처럼 교차로 그려지는데, 특이한 점은 각 인물이 이상한 일을 겪고 서로 스쳐가는 대목들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많은 인물을 다루면서도 각각의 특징을 잘 부각해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끌어간다. 연쇄토막살인사건은 맥거핀으로, 토막난 시체를 엉뚱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건사고들과 그것을 통해 결국 깨닫게 되는 진실의 당황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사신 치바>는 단편집으로,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부문상을 수상한 <치바는 정확하다>를 수록하고 있다. 치바는 사신이다. 늘 비를 몰고 다니고 맨손으로 사람과 접촉하면 사람을 기절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수명을 1년 줄이게 된다. 그는 어떤 사람이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죽어도 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치바는 운명적 사랑을 발견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의협심이 넘치는 야쿠자나 스토킹을 당하는 여자를 만나기도 하며, 예전에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 만났던 여인을 다시 만나기도 한다. 그는 대개의 경우 죽여도 된다는 ‘가’ 결정을 내리지만 죽음과 관계없이 사람들은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음악이 훨씬 귀중한데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건 가리지 않고 다 한다”고 생각하는 치바는 단순한 죽음의 메신저가 아니라 매력적인 관찰자이다. <중력 삐에로>는 자신의 DNA를 경멸하는 하루와 그의 형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치명적이고 기이한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 같은 거창한 소재들을 찰진 문장력과 유머감각으로 버무릴 줄 아는 이사카 고타로의 재능은 나오키상의 후광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