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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봉석이 <구타유발자들>을 지지하는 이유

불편함,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

<구타유발자들>은 무척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대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할까? 유일하게 여자인 인정?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인 고등학생 현재? 하지만 그들에게도 원죄는 있다. 인정이 교수인 영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외진 강가까지 따라온 이유는, 뮤지컬 오디션에 힘을 써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권력에 타협한 것 역시, 죄다. 현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동일한 폭력을 휘두른다. 개인적으로는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건 현재는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구타유발’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들에게는 맞을 만한 최소한의 이유가 있다. 타인이 때리고 싶어질, 뭔가 근질근질한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 누가, 누구를 구타하는 것일까? 초반의 가해자는 시골 양아치들이다. 도시에서 온 영선과 인정은 야만스러운 그들에게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한다. 영선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인정 역시, 그들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다시 영선의 차를 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정은, 그들이 현재를 괴롭히는 것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보지 않았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도시인이 보기에, 시골 양아치인 그들은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여행을 떠난 도시인들이 한적한 시골의 살인마들에게 참사를 당하는 영화의 대표작은 토브 후퍼의 <텍사스 살인마>와 웨스 크레이븐의 <힐스 해브 아이즈>다. 이런 영화들은 60년대 후반 들어 극심해진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현저하게 다른 존재였다. 쉽사리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증오하는 마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구타유발자들>은 무구한 도시인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하는 공포영화는 아니다. 여기에는 선인과 악인이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악인들 아니 죄인들끼리 이전투구를 벌인다. 또한 이 시골 양아치들은, 영선의 커다란 몸집을 보고 움찔할 정도로 단순하다. 교수라는 권위에, 잠깐 감탄하기도 한다. 적어도 이들은 대화가 가능한, 그러나 순식간에 광기에 사로잡히는 현대인의 일종일 뿐이다. 그저 다른 곳에 살고 있고, 생활양식이 조금 다른 것뿐이다. 그러니 <구타유발자들>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우리 문명 자체의 붕괴현상을 보여주는 관찰지에 가깝다.

대체로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시골은, 일종의 낙원이었다. <선생 김봉두>의 타락한 선생은, 강원도 산골에서 잃어버린 순수와 미래의 희망을 발견한다. 도시의 비정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은 시골의 유순한 자연과 여전한 인정을 만끽하며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안개마을>이 폐쇄적인 시골 마을의 야만적인 내면을 다룬 정도였다. 하지만 <구타유발자들>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 도시인의 낭만을 부수는 동시에, 할리우드 공포영화가 흔히 그리는 무자비한 살인마들의 은신처이기를 거부한다. <구타유발자들>의 시골은, 그저 도시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아니 도시의 빈민가처럼, 산업화를 지나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지났어도 여전히 낙후하고 소외된 버려진 공간일 뿐이다. <구타유발자들>은 도시의 변방인 시골, 거기에서 또 낙오된 양아치들이 벌이는 소동극이다.

<구타유발자들>이 폭력에서 시작하여, 폭력으로 마감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명은 폭력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단지 <구타유발자들>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신체적 폭력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구타유발자들>은 육체적 폭력으로 망가져버린 정신이 반복하는, 연속적인 폭력을 보여준다. 폭력은 눈사태처럼 불어나기만 한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되돌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받은 폭력은, 반드시 폭력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사회의 승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량한 권력이라도 휘두르는 경찰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맞고, 비명을 지르느라 모든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구타유발자들>에는 관객이 빠져나갈 여지가 전혀 없다. 닫힌 공간 안에 죄지은 자들을 몰아넣고, 끝까지 몰아붙이기만 한다. 그 불친절함을 탓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타유발자들>의 불편함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오히려 십자가는 더 무겁고, 가시관은 더 날카로워야 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아예 폭력의 피웅덩이를 만들었다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찬사를 보낼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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