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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의 전복적 매력과 치명적 허점

여성주의적 독해를 중단시키는 철자 바꾸기

1. 앎에 대한 사랑

소설로서의 <다빈치 코드>는 몰아치는 한번의 숨결, 즉 단숨에 읽는다는 표현이 적합한 소설이다. 기호학이 대중화된 지식으로 전화하면서 상용화된 몇개의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코드와 인코딩, 디코딩과 같은 것이다. 또 기호학자 소쉬르가 이론화하고자 했던 유대교 카발리스트 전통에서 비롯된 아나그램(철자 수수께끼 맞히기)이다. <다빈치 코드>는 기호학과 예술품의 독해 그리고 여신과 남신이 함께 우주적 기호의 완성을 이루는 이교의 전통을 ‘매 장면이 서프라이즈로 가득 차게 하라!’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따라 숨가쁘게 뒤섞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각장이 반전의 연속이다. 특히 이 수수께끼가 예수와 그의 12명의 남자 제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의 기원의 전복이라는 것을 달성해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이 베스트셀러를 일부 구원하는 기제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기원 전복의 결정적 코드 제공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비교적 대중적으로 인지 가능한 기호학적 용어들을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 하버드대 교수인 주인공과 프랑스 경찰국의 암호 해독 담당 소피 느뵈 (오드리 토투)로 하여금 좀더 평이하게 활용하게 한다. 또 다른 한편 서구 역사에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인물들, 예컨대 예수와 다빈치 그리고 뉴턴을 한괘로 묶어 거의 영원한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의 공급자들로 만들고 오푸스 데이 종교 집단과 역사가이자 대단한 자산가인 리 티빙(이안 매켈런) 등을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뵈 등과 더불어 위의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의 추적자로 만든다.

“앎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리는 욕동이 있다. 이 알고자 하는 욕동은 특히 미스터리, 탐정소설과 같은 장르에서 독자를 열중하게 만드는 힘이다. 예를 들자면 <대장금>은 바로 이 앎에 대한 욕동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TV드라마다. <대장금>은 독자에게 2가지 층위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그 하나가 서사적 층위, 통시적 차원으로 드라마 초반부에 던져진 코드들, 세명의 여자들에 대한 예언, 병의 원인들에 대한 대답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축은 공시적 차원으로 즉각적 만족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의 재료, 조리 과정의 비밀, 그 맛(효과)이 드러나고, 올바른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진다.

이런 앎에 대한 사랑은 정신분석학에선 에피스테모필리아(epistemophili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샤론 로스라는 미디어학자는 <플로우>(Flow)라는 웹 라인 저널에서 최근 미국의 드라마들인 <닙/턱> <위기의 주부들> <로스트> <미디엄> 등을 ‘의미있는 미스터리’로 칭한다. 그리고 바로 이 미스터리들이 이른바 절차상의 법정에서의 진실과 “미스터리 해결”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미국 문화의 지배적 흐름과 달리 다 커다란 미스터리를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는 것을 그 미덕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있는 미스터리물’들이 유행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보통 미스터리물들이 “다음엔 뭔 일이 일어날까?”라는 예측의 즐거움을 주는 데 반해 이러한 좀더 커다란 미스터리를 내장한 작품의 경우 “미스터리 자체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광의의 의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다. 즉 앎의 욕동을 자극하는 것이다.

2. 대중문화 버전의 여성주의

<대장금>이나 <위기의 주부들> 그리고 <다빈치 코드>가 가동시키는 것은 앎의 욕동과 더불어, 여성주의에 대한 친화성이다. 위대한 장금 탄생 이야기는 물론이고, 주부들의 비주부적 욕망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교회로 제도화되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숙청된 인물로 보는 소설 <다빈치 코드>는 잠재적으로 우리의 앎의 질서를 여성 차이성에 친화적인 것으로 코드 전환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있다. 21세기의 대중문화가 이러한 성차에 민감한 지형도를 그려내는 것은 사실 희망적인 일이다. 20세기 여성운동이 대중문화에서 적극적으로 번역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영화 <다빈치 코드>가 이것을 어떻게 시각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지를 살펴보자. 위에서 밝힌 대로 소설 <다빈치 코드>를 단숨에 읽었던 내가 한걸음에 영화 <다빈치 코드>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주연배우들과 감독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가 기호학자인 것도 기호에 맞지 않지만, 오드리 토투가 소피 느뵈라는 것도 매우 불만족스럽다. 그러나 이번주 <전영객잔>에 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포세이돈>이 별 한개도 없음으로 리뷰를 완성할 수 있는 재앙적 재앙영화로 판명되어 어쩔 수 없이 보러 갔다.

예상대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이안 매켈런인데 그가 영화의 종반부 톰 행크스와 오두리 토투를 앞에 놓고, 예의 앎의 욕동(에피스테모필리아)에 사로잡혀 광기의 상태를 설득력있게 연기하는 장면은, 상대방 두 사람의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라는 표정과 비조화를 이루어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가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계의 논란을 두고 했다는 논평 “아니, 예수가 이성애자라는데 왜 그러지?”는 촌철살인 격이다.

여하간, 우리를 막달라 마리아로 이끌어가야 할 오드리 토투는 연기의 목표가 오직 <아멜리에>를 벗어나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듯 시종일관 지적이고 아름답고 신비한 소피 느뵈라는 인물과는 관계없는 경직된 분위기 일색이다.

배우에 대한 불평은 일단 접어두고 이 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이 치닫는 가장 숭고한 목표는 성배(그런데 여기서 성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의 잔과는 거의 관계없는 그 무엇이다)의 형상화다. 그리고 의미론적으로도 이 영화의 결정적 코드는 성배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배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찾는 모험이 <다빈치 코드>의 핵심인데,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예수의 파트너이자 사도로서 그녀를 복원시키려는 것이다. 큰 맥락으로 보아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이전 비교적 성평등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남신과 여신의 공존이라는 이교도적 전통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교리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데 이후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지우면서 여성의 존재가 미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는 이러한 잠재적 전복 가능성이 있는 성배를 형편없이 봉건적 사유인 “황실의 피”(SANGRE ROYAL)로 치환시키고, 인준하는 절차를 밟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자손이 메로빙거 왕조가 되고 또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성스러운 피, 황실의 피이자 성배인 것으로 귀납시킨다. 결국에는 봉건적이고 보수적이고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아나그램, 철자 바꾸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류 교회로부터 짓밟힌 여성 막달라 마리아는 리 티빙의 주장대로 소수자, 주변인의 대변자가 아니라 프랑스 왕조의 시모로 변하는 것이다. 이 현란한 아나그램의 기묘한 자리 바꾸기 속에서 여성주의 친화적 코드 혹은 기독교 비판적 코드는 봉건적 황실의 피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후퇴한다. 우리의 불타오르던 앎의 욕동, 여성주의 독해의 행보는 여기서 그야말로 PS. 공주 소피를 만남으로서 멈추어진다. 앎의 욕동의 질주로서의 <대장금>, 평민이 된 산부인과 여의사로서의 장금이 공주 소피를 넘어 전위로 나서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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