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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사진설명업자 면허증’ 따서 주로 연애극을 맡았지
2001-08-29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 선각자들 4 - 성동호(1)

기생들도 반한 스타, 무성영화시대 극장가를 누비다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적인 변사. 18살에 우미관에서 변사로 데뷔한 이래 특유의 뚝심과 쨍쨍한 목소리로 반년 만에 최고의 변사 자리에 올랐다. 성동호(1904년생)의 전문 장르가 연애극이었기 때문에 기생을 비롯한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았다. 우미관과 단성사, 조선극장 등에서 활동한 일류 변사로서의 실력을 바탕으로 1924년부터 영화 수입과 배급,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특히 나운규의 <두만강을 건너서>(1928)를 개봉시키는 데 공이 컸다. 당시에는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데 검열이 치명적인 요소였는데, 이 문제 때문에 성동호 자신도 1937년에 옥고를 치렀다.

서구에 비해 오래도록 변사 제도가 유지된 한국에서는 변사가 영화의 의미를 끌어내고 결정하는 해석자로 기능했다. 또한 관객이 영화 자체보다 변사의 이름을 보고 영화관을 찾을 정도로 변사는 영화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성동호를 비롯한 일부 변사들은 영화를 이해하는 능력과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배우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했으며 영화 제작에도 참여함으로써 당대의 영화 인력면에서도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무성영화시대 변사의 역할 및 그들의 존재가 후대의 영화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성동호의 증언에서 나타나는 한국영화 초창기의 상영 풍속, 검열과 배급, 극장 경영에 관한 이야기 또한 매우 흥미롭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께서 내가 열여덟살 때 돌아가셨군요. 난 제일고보를 나와서는 상점에서 일을 봐주게 되었지요. 월급이 얼마 되나요? 늘 가까스로 생활했는데, 그때 우미관에 광고를 모집하는 유순근씨더러 “변사는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 그랬더니 60원부터 최하 40원이다, 그래요. 그때 쌀 한 가마니에 7원50전 할 때란 말이에요. 게다가 낮에는 놀고 밤에만 한번 하고,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만 낮에 한번 해주고. 가만히 보니까 생활이 될 거 같아서 한번 내가 해볼 수 없느냐 하고 그 사람을 졸랐어요.

21년 정월 초하룻날 유순근씨가 날 데리고 우미관에 가서 극장 주인이며 직원들한테 소개시켰습니다. 그때 극장은 2층인데, 만원이 되면 한 2천여명 들어와요. 전부 입석입니다. 가운데만 쪼끔 의자가 있고. 의자도 나무때기에다 그냥 널빤지 깔아서 놓구. 2층은 다다미입니다. 전부 신발을 벗고 올라가요, 일본식으로. 영화 프로는 처음엔 실사, 기록영화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2권짜리 단편영화가 있어요. 서부활극이나 희극. 그 다음에 극영화. 한 6∼7권짜리. 그리고는 연속사진이라고 있었어요. 그것이 4권인가, 5권하고. 이게 이제 한 프로예요.

영화가 실사 끝내고 나머지 세개 시작하기 전에, 마에꼬조, 전설(前說- 필자)이라고 해서 변사가 무대에 나갑니다. 악사가 뒤에서 음악을 불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거든요. 그럼 변사가 나와서 “지금 영화는 인제 뭐를 할 텐데 대개 내용이 요러 요렇게 된 내용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영사되는 화면에 설명할 테니까 재밌게 봐주십시오”, 그리구 들어가는 거예요. 마이크 없습니다. 육성이지. 마이크가 있을 까닭이 있나? 그런데 변사가 제대로 못하면 자꾸 쫓겨 들어온단 말야. 손님들이 “목소리가 적다, 안 들린다” 이러고 말이지.

그때는 일주일에 한번씩 영화가 교체되거든요. 한 보름 동안 구경만 하다가 “한번 나가서 시작을 해보겠다”고 그랬어요. 나가보니까 손님들이 정말 콩나물 대가리같이 날 보는데 말이지, 이게 가슴 두근거리고 뭐 야단났더구만. 목청을 다 내서 “지금 소개받은 성동호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입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있어서 내일부터 변사 견습하려고 그러니, 아무쪼록 애호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목소리가 초성인데 빽 울립니다. 그랬더니 “어? 이것 봐라? 음성이 꽤 크다. 꽤 들려. 괜찮다”, 뭐 이런 소리가 들려. 그리구 그 다음날부터 나갔어요. 처음에는 기록영화부터 시작을 했지. 내가 시작하고 한달쯤 있다가 변사 한 사람이 안 나왔어. 그런데 내가 날마다 그걸 보니까 환하거든. “내가 나가서 대신 해볼까요?” 서부극인데 거 잘했어요. 파스(pass- 필자)가 됐어.

경찰의 검열 극심, 키스는 절대 노!

그때쯤은 영화 검열도 종로경찰서 보안계에 있는 순사가 극장에 낮에 나와설랑은 영사를 하고는 검열을 했습니다. 웬만한 거면 모르지만 키스하면 아주 절대 노! 입만 이렇게 대기만 하면 잘라버리고. 근데 그해 6월에 변사 시험을 본다 그런 얘기야. 그때 우미관에 원변사가 다섯, 단성사가 여섯, 그리구 지방에 몇 사람 해서 15명이 신청을 했어요.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다가. 그래 결과가 나오는데 다섯명밖에 합격이 안 됐어. 단성사에서 김덕경, 최종대, 김파형씨, 우미관에서는 이병호씨하고. 그리구 내가 다섯 사람 가운데 끼어 있단 말야요. 열여덟살 때죠. ‘활동사진설명업자 면허증’이라고 경기도지사가 찍은 걸로 나옵디다.

그해 10월에 인사동에 조선극장 단성사가 새로 개관하게 됐습니다. 객석에다 전부 정식 의자를 놓고 2층엔 복도도 있구 신발 신고 올라가게 맹길고, 에레베다(엘리베이터- 필자)까정 놨어요. 그리고는 변사들 끌어갈 것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영화도 우미관보담은 단성사에 상영하는 영화가 질적으로 낫고 관객 수준도 조금 낫고. 또 변사도 단성사쪽이 내가 배울 점이 좀 많은 거 같아서 “좋습니다” 했지. 그래 우미관 있을 때 썼던 마이낑(당시 극장은 인기배우나 변사들의 옷값, 술값 등을 대신 외상해주었다. 이를 마이낑이라 했다- 필자) 200원도 받아 갚고 월급도 50원을 해가지고 21년 10월에 단성사로 옮겼습니다.

단성사주 박승필씨는 서울 분인데 아주 오입쟁입니다. 넘버원입니다, 그분이. 아주 화류계 남아야! 도량이 넓고. 단성사는 직원이 쪼끔 많았어요. 그때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극장감독이지. 박정현씨라고 본래 영사기사예요. 그리고 박승필씨의 형님 되는 분이 경리를 보고. 영사기사 셋, 악사 일곱. 기도, 매표 하나씩. 그리고 프로 짜는 이봉익씨라는 사람이 있었어. 변사로는 김덕경씨가 사극하고 사회극, 최종대씨는 비극, 김용환이하고 나는 연애극, 서상호씨는 활극, 그렇게 잘했지요. 서상호씨가 그때 벌써 모르히네(모르핀- 필자) 중독이에요. 그래서 나오다 안 나오다 그랬어요. 그때 <동도>, 짜프린(채플린- 필자)이 나온 <황금광 시대> 이런 게 기억에 남아요.

선전부는 따로 없고, 특별영화 마찌마와리(연극이나 영화 선전을 위해 거리를 돌며 호객하는 것- 필자) 할 적에는 택시를 두대 부릅니다. 차 지붕을 떼어설랑은 앞에 한대는 악사들 일곱명이 앉고, 뒤에는 변사가 타요. 그리구 기(旗-필자)는 자동차 앞뒤옆에다 쭉 달고, 그리구 자동차 뒤에 매점에서 물건 파는 아이들이 앉아서 전단을 뿌리죠.

우미관 기생들, “성동호를 데려오시오”

그 다음해부터, 이거 좀 모르는 얘긴데, 기생들한테서 전화도 오고 편지도 또 오고 쪽지도 보내고, 뭐, 또, 그러게 되더구만요.(”거 홍안소년 시절이네요. 허허허.”- 대담중의 이영일) 내가 떨려서, 만나야 그저 얘기나 할 뿐이지 얼굴이 후끈거려가지고 뭐…. 그런 시절도 있었지.

단성사에 있다가, 23년 봄에 우미관을 왔어요. 한남 권반(기생조합인 ‘권번’을 지칭. 당시 종로에는 조선, 한성, 한남 등 세개의 권번이 있었다.- 필자) 조합장으로 있는 박재근씨라고 하는 이가 우미관을 빌렸는데, 기생들이 “성동호를 데려오십시오” 그랬나봐. 그래 월급을 좀더 받구, 선금을 받구 해서 자릴 욈겼죠.

그리구 있는데. 하야까와(<춘향전>을 최초로 영화화한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지칭- 필자)라는 일본사람이 조선극장을 경영하게 됐습니다. 어느날 나를 불러서 “9월에 개관할 터인데, 조선극장으로 올 수가 없드냐?” 우미관 온 지가 얼마 안 되는데 곤란하다 그랬더니, 선금도 다 갚아주겠다면서 꼭 오래. 그래서 비밀로 약속을 하고 칠월에 선금을 미리 받았어요. 팔월 말에 우미관에 얘길 하려고 그러는데 마침 불이 났어 우미관이. 다 타버렸어. 목조건물인데 벽만 남고. 박재근씨가 오히려 미안하다구, 단성사 잘 다니던 사람 오래가지고 실직을 하게 해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그래. 내가 선금을 돌려줄 필요도 없게 됐고, 양해도 구할 필요없이 됐어. 자연스럽게 됐죠. (웃음) 그래서 그해 9월부텀 조선극장으로 왔죠.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 최예정/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