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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딱하게 보기] 재난영화에 리셋은 없다, <포세이돈>

<포세이돈>

<포세이돈>을 보고 나니,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이 그리워졌다. <포세이돈>이 최악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인터넷에 오른 악평으로 단련을 하고 갔기에, 충분히 액션만 즐길 수 있었다. 기대를 낮추면, 대부분의 영화가 즐겁다. 거대한 해일에 호화 유람선이 뒤집어지는 과정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멋졌다. 뭐, 그것뿐이다. 지금은 별다른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 <포세이돈>을 떠올리려고 하면,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장면들이 기억난다.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타고 사람들이 올라가고, 물이 들어오자 뒤늦게 저마다 오르려고 하다가 트리가 넘어가버리는 장면, 진 해크먼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공중에 매달려 핸들을 돌리는 장면 등등.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의 장면들도 그렇다. <포세이돈>을 보면서 생각한 것 하나는, <타워링>의 리메이크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리메이크를 만들면 분명히 원작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못 만든 리메이크작에도, 장점은 있다. 보고 나면, 원작이 그리워진다는 것. 원작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였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는 것.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재난영화 두편은,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재난영화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배와 빌딩이 좀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저마다의 철학과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것들도 다르게 마련이다.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해, 오로지 생존을 위해 헌신한다. 생활이라는 말과 달리, 생존에는 뭔가 절박함이 깔려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포세이돈>에는 그런 절박함이 없다. 게임에 등장하는 트랩이나 난관처럼, 머리를 잘 써서 슥 뛰어넘으면 다음에는 조금 더 힘든 단계가 기다릴 뿐이다. 선택이 아니라, 그냥 앞에 있는 고개를 넘을 뿐이다. 그러니 대립도 없고, 갈등도 없다. 그냥 액션뿐이다. 그걸 원하긴 했지만, 보고 나니 좀 허망하기도 하다.

그냥 간단하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더이상 진 해크먼과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충돌이나 폴 뉴먼과 스티브 매퀸의 대립이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무술 시합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들의 생명을 건 돌진이 더이상 의미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도 같다. 사실 재난영화는 퍼즐 게임이 아니다. 위험한 난관이 관심을 끌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난관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안타깝게도 아직 게임에서는 그런 것까지 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일단 죽어도, 리셋을 하면 되니까. 다음에 도전할 때는, 무엇이 함정인지를 알고 있으니까 피해가면 된다. 그러나 재난영화에는 리셋이 없다. 단 한번의 도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게 삶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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