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을 보다가 0.5초쯤 숨을 멈췄다. 배우 류승범이 선경(공효진)과 헤어진 남자친구 준호로 등장한 장면이었다. 그가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소식은 언뜻 접한 것도 같았지만, 그게 예전의 연인 공효진의 상대역인 줄은 미처 몰랐다. 관광 가이드 선경은 다른 여자와 함께 고궁을 찾은 준호와 마주치자 쾌활한 척 수선을 떤다. 준호는 그녀의 명랑함을 불편해한다. 공동의 소지품을 정리하러 다시 만난 선경과 준호는 부질없는 돌팔매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한테?” “난 원래 그랬어. 오빠가 변한 거야.” 두 배우의 연기는 곡진하고, 장면은 농밀했다. 회한의 무게가 담담히 전해졌다. 영화 밖에서 두 사람이 나누었을 인생의 한때가 먼 길을 돌아 영화 안의 진실과 너그럽게 공명하고 있었다.

#2. 실제 연인들이 주연한 영화 <도마뱀> 개봉 즈음, 몇몇 인터뷰는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소문을 캐묻기도 했다. 딱히 우리가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든 연애는 반드시 끝난다. 그러므로 연애의 성패는 결론에 있지 않다. “시간을 멈추고 싶습니다”라는 <도마뱀>의 포스터 카피는 핵심을 짚고 있다. 연애의 전말이 어디로 흘러가건, 연인들은 멈추고 싶은 특별한 시간을 함께 통과한다. 그것만 해도 경천동지할 일이며, 배우에게 큰 자원이 될 경험이다.

#3. 배우처럼 사랑에 빠지기 쉬운 직업도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연기는 자의식을 버리고 감정과 충동에 몸을 실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 작품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이 교감으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난 겨울 방콕영화제에서 본 이탈리아 멜로드라마 <내가 원하는 삶>은, 배우가 얼마나 연애에 감염되기 쉬운 조건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연애를 지속하기 힘든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묘사한 영화였다. 이야기는 실력있는 무명의 여배우가 스타 남자 배우와 오디션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신인 여배우의 진정어린 애드리브가 남자의 마음을 흔들면서 사랑이 싹튼다. 영화 한편이 완성되기까지 겪는 숱한 우여곡절은 둘의 연애에 파장과 위기를 초래하고 화해와 갈등을 반복하던 두 사람은 크랭크업을 앞두고 헤어지기를 결심한다. <내가 원하는 삶>에는, 자신이 잘 아는 세계의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놓는 영화다운 설득력이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배우의 삶이 연예 가십의 소재로만 소모되는 건 낭비임을 문득 깨달았다. 그들의 삶은 마땅히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올해 전주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배우 최민식은, 배우에게 ‘타의 모범’이 되는 언행을 강요하는 시선의 감옥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젊은 후배들에게 감정이 동하면 눈치보지 말고 마음껏 사랑하라고 권한다고 했다. 그가 옳다. 또래의 평균적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더 빈약한 감정 교육을 받은 사람이 유연하고 유창한 배우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배우들의 좀더 활발한 연애와 실연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