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는 런던의 출판사에 다니는 32살의 미혼여성. 명절 때면 남자를 엮어주려는 어머니와 애인 없냐는 주변의 참견에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는 새해부터 칼로리와 흡연량, 주량 메모를 포함한 일기를 쓰면서 생활을 개선하자고 결심한다. 성탄파티에서 소개받은 무뚝뚝한 인권변호사 마크 다시(콜린 퍼스)와 떨떠름한 첫인상만 남기고 헤어진 브리짓은, 바람둥이 직장 상사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연인의 아파트에서 벌거벗은 여자와 마주친 날 브리짓의 짧은 사랑은 파국을 맞고, 새 애인을 사귄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아빠를 돌보는 일까지 짊어진다. 방송사 리포터로 이직한 브리짓은 마크의 도움으로 특종을 얻고 파티에 그를 초대해 따뜻한 한때를 보내지만 불쑥 찾아온 다니엘의 구애와 두 남자의 주먹다짐으로 서로를 오해한 채 헤어진다. 다니엘과 마크의 과거사를 알게 된 브리짓은 마침내 마크를 향한 감정을 확신하지만 마크와 다른 여성의 약혼이 발표된다.
■ Review
“일정한 나이를 지난 여자가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은 원자폭탄 투하 뒤 살아남을 확률보다 낮다.” 이제는 클래식이 된 로맨틱코미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 나오는 몰인정한 대사다. 서른두살 먹은 런던의 노처녀 브리짓은 말하자면 그 희박한 확률의 ‘희생자’다. 근사한 남자친구의 에스코트를 후광으로 두르고 다니지 못하는 거야 아쉬운 대로 참을 만하지만, 문제는 온 세상이 합세해 몰아세우는 통에 어느새 스스로도 자신을 동정하게 된다는 처량한 사실. “술병을 애인 삼아 끼고 여생을 보내다가 어느날 독신자 아파트에서 홀로 죽고 나면 3주 뒤에 기르는 애완견에게 1/3쯤 뜯어먹힌 시체로 발견되겠지.” 영화가 상상 화면까지 친절히 곁들여 보여주는 브리짓의 악몽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난다. 니코틴과 알코올과 칼로리 섭취량을 강박적으로 체크하는 브리짓의 일기는 그녀를 가위눌리게 하는 불안의 단면이다.“서른살 넘은 독신여성과 게이남성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유대가 형성된다. 이들은 모두 부모를 실망시키고 사회로부터 괴물 취급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원작인 헬렌 필딩의 베스트셀러가 내놓은 정리(定理)다. 그래서 브리짓은 결혼한 친구들의 쌍쌍 저녁파티에 초대받는 일을 고문으로 여기고, 모든 런던 시민이 자기 체중을 주시한다는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밤이면 를 목놓아 따라부른다. 독신 직장여성들의 ‘애환’을 다룬 포스트 페미니스트 문화상품으로는 TV쇼 <앨리의 사랑 만들기>과 <섹스 앤 시티>가 이미 잭팟을 터뜨렸으나 미국산 자매품들과 달리 영국산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수더분하다. 속내야 어쨌건 화려한 커리어를 남녀 관계에 대한 교훈을 얻는 일종의 학습장으로 이용하는 두 TV시리즈의 여피 헤로인들과 달리, 브리짓은 퇴근시간만 고대하는 실수투성이 월급쟁이다. 실연 이후 방송사라는 폼나는 직장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그 역시 그녀의 숨은 지성이 발견돼서라기보다 면접담당 간부가 “상사와 연애하다” 그만뒀다는 브리짓의 고백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한편, 흑맥주와 피자로 몸를 만들었다는 르네 젤위거가 호연한 브리짓은 <뮤리엘의 웨딩>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정상 체중의 여성. 지방으로 울퉁불퉁한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데이트에 야한 란제리를 입을까 보정용 속옷을 입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로맨틱코미디의 여주인공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연애의 묘약이 필요한 브리짓에게 다가온 두 남자는 섹시한 편집장 다니엘 클리버와 우울한 인권변호사 마크 다아시. “오늘은 스커트가 병가를 냈나?” 이렇게 썰렁한 농담으로 수작을 건 연애가 제대로 풀릴 리 없지만, 브리짓은 패션감각 없는 다아시보다 세련된 다니엘에게 기운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을 자임하는 <브리짓…>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다. 심지어 6년 전의 인기시리즈 <오만과 편견>에서 미스터 다아시 역을 맡았던 콜린 퍼스가 연기하는 마크 다아시는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센스, 센시빌리티>의 브랜든 대령, <엠마>의 나이틀리가 그랬듯이 여주인공의 철부지 행각을 지그시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 사려깊은 손길을 내민다.
마크 다아시가 제인 오스틴 가문 출신이라면 브리짓 존스는 공동각색자 리처드 커티스가 세운 전통에 따라 든든한 친구들을 거느린다. 브리짓이 히스테리를 일으킬 때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합하는 입담 험한 페미니스트 샤자와 골칫거리 애인을 둔 주드, 왕년의 팝스타였던 게이 톰은 원작에서도 중요한 조연이지만 <네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에서 리처드 커티스가 창조해낸 사랑스런 패거리 친구들의 또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뒷얘기를 들추자면 영화 <브리짓…> 자체도 동아리문화의 산물. 다큐멘터리 출신의 데뷔감독 샤론 맥과이어는 브리짓의 친구 샤자의 모델이고 작가 커티스는 필딩의 옛 남자친구였으며 커티스의 현 부인은 이 영화의 홍보에 참여했다고 한다. 공동작가 앤드루 데이비스는 콜린 퍼스가 출연한 TV판 <오만과 편견>을 썼고, 이만한 내부자는 아니지만, “총명한 희극적 창조”라고 필딩의 원작을 칭찬했던 작가 샐먼 루시디도 깜짝 카메오로 등장한다.
로맨틱코미디의 귀재로서 각색에 센 입김을 끼쳤으리라 짐작되는 커티스는 원작의 일기체를 영화의 얼개에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상 스케치는 줄어들고 드라마틱한 연애담이 부각됐다. 그러나 <브리짓…>에는 여전히 극중 인물을 비하하거나, 웃기고야 말겠다고 악착을 떠는 법이 없는 리처드 커티스식 코미디의 여유가 있다. 마크와 다니엘이 어설픈 주먹다짐을 벌이다 밀려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얼떨결에 생일 축하송을 따라부르는 시퀀스는 그런 미덕을 보여주는 수수한 명장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커피 테이블의 수다 같은, 공감의 영화다. <네번의 결혼식…>의 전복성도 <노팅힐>의 감동도 원작소설의 재기도 능가하지 못하지만, <브리짓…>은 인생의 특정한 느낌을 공유하는 관객, 즉 ‘그리 우아하지 못한 싱글’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바싹 다가앉아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다. 친척 모임에 빠질 핑계를 만드느라 고민한 적 없나요? 영화 <위험한 정사>를 보며 남들이 통쾌해하는 글렌 클로즈의 죽음을 연민한 적 없나요? 퇴근 뒤 화장을 지우다 거울 앞에서 멍해진 적은? 회식이 끝난 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울음을 터뜨린 적은? 당신은 그런 적이 없나요?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마크 다아시 역의 콜린 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