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돌아서서 후회한다. 소중한 사람을 충분히 아끼지 못하고, 마음은 그게 아닌데 진심을 몰라주는 상대의 모습에 발끈하여 막말을 내뱉고, 나의 불안함을 이유로 사랑하는 이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어버리고. 이런 종류의 후회는 항상 가깝고 당연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얻고, 가족의 잃고, 가족을 꿈꾸는 이들이 등장하는 <가족의 탄생>은 평범한 우리가 늘 맞닥뜨리는 후회와 깨달음의 궤적을 섬세한 발걸음으로 뒤쫓는 영화다 .
첫 번째 에피소드는 홀로 분식집을 운영하던 미라(문소리)가 몇년 만에 찾아온 말썽쟁이 남동생 형철(엄태웅)을 맞이하면서 시작한다. 반가움도 잠시, 형철이 자신의 부인이라며 소개한 무신(고두심)은 그의 어머니라 해도 믿을 지경이다. 언제나 제멋대로이긴 해도 품 안의 자식 같고 살가운 연인 같던 남동생은 이제 밤마다 연인과 사랑을 확인하느라 바쁘다. 그래도 가족이라며 웬만큼 정을 붙이고 살 만해질 무렵, 무신의 전남편의 전 부인의 딸 채현이 찾아온다. 이 에피소드의 인물들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함을 자랑하지만 친근한 이웃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이들이 지닌 사랑스러운 씩씩함 때문이다. 속없고 욕심없는 듯 보이는 미라는 사실 억척스러운 생활력, 망나니 같은 남동생에게 야멸차게 속내를 내보이는 강단의 소유자다. 단단하기로 따지면 아들뻘 되는 젊은 연인을 요리하는 무신을 따를 자가 없다. 진담과 농담, 내숭과 도발, 소심과 대담을 무시로 넘나들며 끝내 허허 웃어버리는 이 여자의 매력은, 고두심의 연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가족의 기묘한 확장을 그린다면, 평생 동안 키워온 애증의 고삐를 늦추지 못한 채 이별을 맞이하는 모녀가 주인공인 두 번째 에피소드는 가족의 상실을 이야기한다. 가장된 명랑함 속에 칼을 감춘 선경(공효진)은 가까운 이들과 자신을 할퀴기 일쑤다. 사람들이 자신의 못난 모습에 놀라는 게 싫고, 그럼에도 다가오는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준 뒤 또 한번 놀라는 그는, ‘사랑밖엔 난 몰라’라는 태도로 자식을 방관한 줄 알았던 어머니 매자(김혜옥)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한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경석이다. 통속적이고 전형적이어서 흡사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 포진한 이 에피소드의 미덕은 내밀한 묘사력에 있다. 으레 그러려니 넘어갔던 평범한 감정이 뿌리를 내리는 그 과정 못잖게 흥미로운 것은 세심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심드렁한 템포와 정서다. 엄마는 딸에게 변명하거나 살가운 말을 건네지 않은 채 사랑을 증명하고, 누나는 동생을 마구 대하면서도 그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못한다. 감정의 클라이맥스는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어느 고즈넉한 오후에 찾아온다.
깜찍한 로맨틱코미디의 외양을 지닌 마지막 에피소드는 앞선 두개의 이야기의 흥미로운 후일담이기도 하다. 무신과 형철을 불쑥 찾아왔던 꼬마 채현과 “고집 세고 단순한” 꼬마 경석이 자라 연인이 된 것이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순진무구한 친절함으로 이겨냈을 채현(정유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그토록 증오했던 엄마를 닮아가는 누나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운 경석(봉태규)은 그런 채현 옆에서 항상 외롭다. 두 남녀의 이해 가능한 투닥거림은 일견 평범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비오는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화벨 소리 하나에도 깜짝 놀라던 미라, 너무 늦게 깨달은 엄마의 사랑에 홀로 울던 선경 등 외로운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던 과거의 주인공들은 진심어린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하나같이 범상찮은, 그러나 누구보다 행복한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혈연이나 당위, 의무가 아닌 솔직함과 소중함, 세월 속에 깊어진 정이다.
<가족의 탄생>의 세 가지 에피소드는 무리한 우연으로 서로 연결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고유한 제목이 존재하는 않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완결성있는 단편이면서, 서로 다른 인과율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보완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여러 명의 주인공을 거느린 여느 다중플롯 영화와는 사뭇 다른 구조가 눈길을 끄는 이 영화는 인간 군상 전체를 향한 거대한 시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가장 가까운 관계, 가장 당연한 감정, 가장 소박한 갈등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결정짓는 것은 치열함이나 열정이 아닌, 연민과 끈기다. 미라와 형철, 선경과 매자, 경석과 채현, 모든 에피소드에서 모든 인물들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라며 상대에게 항변하는데, 김태용 감독은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이루 말 못할 복잡한 속내를 지닌 이 대사에 담긴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을 끝내 설명해낸다. 매번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갈등하던 이들은 함께 둘러앉아 밥 한끼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임을 받아들인다.
김태용 감독이 민규동 감독과 공동연출한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여고 시절의 독특한 공기를 효과적으로 포착한 묘한 영화였다. 선생과 학생, 억압과 자유를 대립시키기보다는 모든 인물들에게 골고루 사연을 안배하여 공감을 이끌어냈던 전작의 사려깊은 면모는 <가족의 탄생>에서도 여전하다. 제목만 듣고 가족제도의 폐해, 진실된 관계를 방해하는 사회구조를 까발릴 것이라 짐작한다면 대단한 오해가 될 것이다. 오로지 여성에 의해 진행되는 이 영화는 인간관계와 감정 그 자체에 대한 고찰에 방점을 찍는다. 인물을 보듬는 감독의 속깊은 성찰력은, 다양한 여자들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짧지만 강렬한 감정의 파고를 담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영화에 비할 만하다. 이는 그간의 한국 상업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었던 친절하고 기묘한 예민함이기에 더욱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