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에게 듣는 가장 가혹한 명령은 자신 말고 다른 이를 사랑하라는 말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된 연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다른 이를 품은 채 눈앞의 타인을 몸으로 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소니 짐머>의 오프닝을 여는 매혹적인 다리의 소유자인 키아라(소피 마르소)가 고대하던 애인의 얼굴 대신 받게 된 메시지는 바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행당하고 있으니 “다른 남자를 찾아 동행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아름다운 키아라의 얼굴에 처연한 빛까지 감돌게 만들어 열차에 오른 그녀에게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쏟아지도록 만든다. 그녀의 동행으로 선택당한 행운의 사나이 프랑수아(이반 아탈)는 그 이후부터 ‘안소니 짐머’로 오인되어 알 수 없는 추격전에 휩쓸리게 된다.
키아라의 사랑을 소유한 ‘안소니 짐머’는 검은돈 세탁의 일인자이지만 수차례의 성형수술로 얼굴도 목소리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단서를 하나도 잡지 못한 경찰은 오로지 키아라를 향한 그의 사랑에 의지해 추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청부업자와 경찰은 키아라를 인질로 삼고 ‘안소니 짐머’에게 “지금 오지 않으면 너무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끝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고 그녀와 단 한번 키스 이후 ‘죽음을 각오’하고 안소니 짐머가 되기로 한 프랑수아만이 그녀를 위해서 달린다. 과연 ‘안소니 짐머’의 정체는 무엇이며, 키아라는 누구의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이 영화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제롬 살레는 ‘안소니 짐머’라는 미스터리한 범죄자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과학적 수사와 추리라는 지적인 영역보다는 키아라의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영역에 더 초점을 맞춘다. 수사관인 애커만(샤미 프레이)조차 범죄자 ‘안소니 짐머’의 정체를 밝히기보다는 키아라의 애인으로서 그의 정체를 더 궁금해하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진짜 안소니 짐머와 프랑수아 그리고 애커만은 서로 키아라의 마음속에서 ‘짐머’(Zimmer는 독일어로 ‘방’이라는 뜻)라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묘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작품의 긴장은 키아라의 감정선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카메라는 계속해서 불혹의 나이에 탄력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소피 마르소를 훑어내린다. 청부업자와 영어로 의사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애커만의 단호한 목소리처럼,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스릴러 형식과 결별한 채 모호하고, 느슨한 서사와 다소 지루하고 정적인 리듬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