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한 기세가 대단했지”
4월14일 금요일, 빈소 셋쨋날
원로영화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빈소에서, 현재 활동 중인 영화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세대 배우 중 이병헌이 유일하게 조문하여 잠시 술렁였고, 배우 안성기, 박중훈을 비롯하여 이창동 감독 등이 다녀갔다고 누군가가 귀띔한다. 납북 이후 충무로에서 활동하지 못했던 공백기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명실상부한 한국 영화계의 큰형이라도, 젊은이들에게 그는 아득한 전설일 뿐이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 “신상옥은 현장에서 자신을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썼다. 60, 70년대 그와 함께 충무로를 지켰던 후배며 동료 영화인들의 증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경태 감독은 그의 조감독들이 저마다 자신도 모르게 선배의 독특한 스타일의 일부를 따라하곤 했다며 희미하게 웃는다. 언제나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멋진 필체와 품새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휘갈기는 그의 버릇, 머리를 뒤로 넘기는 매무새나 성큼성큼 내딛던 걸음걸이까지, 사소한 행동거지가 모여 그의 가공할 카리스마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는 반할 수밖에 없는 거목이었다. 최경옥 감독은 주머니에 돈을 챙겨다닐 줄 몰랐던 신상옥 감독의 버릇을 떠올린다. “지나가다 극장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그냥 쓱 들어가는 거야. 냉면을 정말 좋아하시는 양반이 냉면집에 가면 후루룩 냉면을 혼자 다 먹어버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나한테 돈을 내라는 말도 안 해.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어. 아마 내가 제작부거나 연출부니까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그의 <성춘향>이 세기의 대결을 벌일 때, 그는 먼저 개봉한 <춘향전>을 보기 위해 관객이 늘어선 줄을 보고도 남들 앞에서 크게 근심하지 않았고, <성춘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을 때도 크게 웃지 않았다. 이만희, 유현목 등 동시대 감독들과 달리 술과 담배를 손에 대지도 않던 그가 대체 어떤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는지는 아직도 불가사의다. 사람들은 그가 몸에 나쁜 것을 가까이 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고도 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라 짐작하기도 한다.
기인의 풍모를 완성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다. 그는 연출부 막내는 물론이고, 자동차 운전사부터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반영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후배의 의사와 관계없이 연출작을 맡기고 제작비를 통제하는 독재자형 제작자 신상옥을 예상했건만, 이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그의 열정 자체가 이재에 밝은 제작자와는 거리가 멀다. 이경태 감독은 한여름 가뭄으로 갈라진 논바닥을 만들기 위해 몇 마지기 논에 구들장을 깔아 불을 땠던 <열녀문>(1962)의 촬영을 떠올린다. “신 감독 때문에 회사 경리부는 늘 안달이었지. 후배가 감독할 때도 제작비는 신경도 안 썼어.” 물론 영화제작의 모든 것을 훤히 꿰던 그에게 이유없이 과도한 제작비를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에 꼭 맞는 호화 세트를 만들지 않으면 촬영할 수 없다고 버티는 후배를, “돈 때문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라며 설득하는 선배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승부사였다. “제아무리 좋은 기획도 타이밍을 놓치면 소용없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던 신상옥 감독이 데뷔작으로 권해주던 <비나리는 고모령>을 이런저런 이유로 고사했던 이경태 감독은, 선배와 자신의 결정적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뛰어들 엄두를 냈지만, 신 감독은 일단 뛰어들고 정리해. 모든 걸 본인이 하다보니 시간도 없고, 고정관념이라는 게 있을 수도 없었을 거야.”
“내 상대는 이만희였고, 내가 넘을 고개는 신상옥”이었다는 정진우 감독(<춘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은 “신상옥의 독주를 따라잡으려는 라이벌과 그를 뛰어넘으려는 젊은 감독들”이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낳았다며 선배를 향한 오랜 애증을 고백한다. 그는 촬영과 조명을 도맡고 27살부터 제작을 겸하면서 신상옥의 뒤를 밟았던 경력의 소유자다. 다소 늦은 시각에 갑작스레 빈소를 찾아 후배 영화인들을 술렁이게 한 유현목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6·25 와중에 데뷔작 <악야>(1952)를 완성할 당시 연출부로 도왔던 기억을 더듬는다. “함경도 출신이라 그런지 통이 컸어. 내가 한살 위인데도 늘 이름을 부르고, 존댓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 근데 뭐, 그는 원래 그런 놈이야. <오발탄>처럼 어두운 영화를 만드는 나와 그는 야심의 성격이나 스케일이 달랐어. 하지만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인정하고 있었지.” “달을 찍으라는 주문에, 유현목은 가녀린 초승달을 찍고 신상옥은 위풍당당한 대보름달을 찍을 것”이라는 정지우 감독의 설명이 꼭 들어맞는다. “해방 뒤 1세대 삼총사 중에서 김기영도 죽고, 신상옥도 갔으니 이젠 정말 외톨이가 됐다”며 노감독이 씁쓸하게 웃는다. 한 시대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인들의 수다는 그칠 줄 모르는데, 발인을 앞둔 빈소는 한없이 적막하다.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거장이었어”
4월15일 토요일, 영결식
발인에 이어 진행된 영결식을 마무리한 추모곡은 <빨간 마후라>(1964) 주제곡이다. 공군가로 여겨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노래라 하니, 공군참모총장이 그의 빈소를 찾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고인을 기억하는 지인들이 한목소리를 내는데, 슬프고 애틋한 영결식의 분위기와 당당한 기개를 지닌 노래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건성으로 따라가던 노래 가사의 한 구절에 문득 울컥해진다.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청춘이 번개처럼 지나간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탈북 이후 미국 시절,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경태 감독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어서 못해먹갔다’고 할지언정 ‘이제 나는 안 될 것 같다’는 약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정진우 감독은 “입관할 때 최은희씨가 신 감독에게 키스를 하는데, 그걸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 양반은 그런 걸 가지고 우냐며 삑 웃고 말았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니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영결식을 지켜보며, 특유의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색빛 하늘이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원. 준비된 자리로 관을 내리고 흙이 덮이기 시작한다. “여보. 사랑했어요.” 미망인의 눈물 섞인 마지막 인사가 비어져 나온다. 그 순간, 여전히 당당한 풍채를 지닌 배우 남궁원이 눈물을 훔친다. 주위를 둘러보니 까마득한 선배와 함께 빛나는 청춘을 보냈던 후배감독들의 눈시울도 이미 벌겋다. 그들에게 신상옥 감독은 진력을 기울여도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장인이었고, 그저 믿음직스런 선배였다. “싫은 놈 좋은 놈이 분명해서 아무한테나 허허거리는 일이 없었어. 남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비정한 양반이야. 누가 자기를 비난해도 그냥 씩 웃으면 그만이지, 해명 같은 거 절대 안 해. 속상하고 화나도 소리지르고 싸우는 법이 없었으니까.”(정진우)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 같지만, 자기가 나서서 정치나 경제에 매여서 아첨하진 않았을거야.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거든.”(남궁원) “영화를 많이 보긴 했는데 남의 영화 얘기 절대 안 했어. 다른 사람들은 아예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봤던 거 같아. 최근에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를 보고 ‘잘 만들긴 했는데, 좀 덜 익었더라’라는 말을 했지.”(이경태) 애틋한 애정보다는 확고한 신뢰를 앞세운 이러한 말들은, 오랜 세월 신상옥 감독을 지켜본 끝에 최고를 향한 그의 남다른 집념과 자신감을 이해하게 된 이들의 것이다.
모든 절차가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간 무덤가에는,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는 인부들과 여전한 카리스마로 가득한 영정사진만이 남는다.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입양한 아들이 고사리 손을 내밀며 뽀뽀를 청해도 얼굴이 굳어져 몸둘 바를 몰랐던 신상옥 감독의 모습을 묘사한 바 있다. 자식이며 가족보다 영화를 앞세우느라 부인 최은희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살가운 정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고, 거침없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다보니 절친한 친구 한명 없이 사방에 적을 두었다는 그의 삶을 떠올리며 뒤를 돌아본다. 정작 자신은 후회도 없고 쓸쓸함도 몰랐다는 듯한 사진 속 고인의 웃음에, 모든 염려가 그저 외람되다. 그제야 진심을 담아, 실체조차 막막하던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