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였을까? 어느날 문득 만약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무슨 과정을 선택할까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통계학과 전산학을 모두 가르치던 과의 특성상 선택의 폭이 넓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공지능 연구실’이었다. 물론 전산학이나 통계학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전혀 없는, 다시 말해 갓 1학년 전공필수로 ‘통계학 개론’과 ‘전산학 개론’을 마친 상태에서 그저 ‘멋질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대답일 뿐이었다. 지금 인터넷이 이렇게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네트워크 연구실’을 먼저 꼽았을 텐데 말이다. 여하튼 졸업할 즈음이 되자, 나는 ‘인공지능’이라는 분야가 그리 녹록한, 다시 말해 조만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컴퓨터로 하여금 인간의 두뇌를 흉내내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뒤로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것은 아마도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고 스필버그가 <A.I.> 를 대신 연출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과연 큐브릭은 인공지능이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했으며, 스필버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던 지난 초여름부터, 인터넷에서는 영화 <A.I.> 가 색다른 이유로 인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예고편이 겨우 인터넷을 통해 공개될 그 시점에서 <A.I.> 가 화제가 된 이유는 바로 예고편의 엔딩 크레디트에 삽입된 한 여성 스탭의 직업 때문. 지금도 <A.I.> 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A.I.> 의 그 예고편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Sentient Machine Therapist’라는 직업과 함께 지닌 살라(Jeanine Salla)라는 여성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감성을 지닌 기계를 위한 치료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그 직업 자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감성을 지닌 기계’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현 상황에서, ‘감성을 지닌 기계를 위한 치료사’가 영화에 출연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위해 제작에 참여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순식간에 인터넷을 통해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그녀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시작되었다. 놀라운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지닌 살라라는 인물이 공식 홈페이지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정보들에 따르면 그녀는 뉴욕주에 있는 뱅갈로 월드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문제는 뉴욕에는 그런 대학이 없는데다가, 홈페이지에 있는 그 대학의 공식 로고를 보면 2028년에 설립된 것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지닌 살라라는 여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필버그 감독은 왜 그런 가상의 인물을 예고편의 엔딩 크레디트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 이유는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반 챈(Evan Chan)이라는 한 남성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이야기란 지닌 살라의 친구로 생태학자였던 이반이, 수영과 항해에 능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그를 사랑하던 ‘감성이 있는 보트’인 클라우드메이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지닌은 그의 죽음이 음모가 있는 살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반의 죽음과 연관된 사람들과 감성을 지닌 로봇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렇게 지닌이 던져주는 이야기를 하나씩 읽다보면 어렴풋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듯해, 점점 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특히 이반의 죽음과 관련된 인터넷 링크들을 하나씩 보다가, 어느 순간 ‘당신도 다칠지 모른다’라는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죽은 이반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이 나타나는 것까지 경험하면 이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헤어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자신이 탐정이 된 듯한 기분으로 미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스필버그가 네티즌에게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게임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탈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네티즌들은 이 흥미진진한 게임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찾은 실마리들을 인터넷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환하고 있다. 물론 스필버그의 또다른 영화 홍보전략에 놀아나는 네티즌이 딱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네티즌은 다른 영화의 인터넷 홍보와는 달리 신선한 시도였다는 평가를 내리는 중이다.
여하튼 좀 복잡한 영화 홍보의 방법이기는 했지만, ‘지닌 살라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영화에 대한 뻔한 정보만을 제공하던 기존의 관행을 깨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인공지능에 대한 깊이있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워터 월드>처럼 몇몇 영화들이 홈페이지를 일종의 어드벤처게임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예가 있긴 했지만, 그와는 달리 <A.I.> 의 이런 시도가 칭찬듣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을 계기로 좀더 인터넷의 특성을 잘 이용하는 새로운 홍보기법들이 많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은 그다지 무리가 아닐 듯싶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A.I.> 공식 홈페이지 http://aimovie.warnerbros.com/
지닌 살라 공식 홈페이지 http://www.jeaninesalla.com/
Ain’t-it-cool-news <A.I.> 페이지 http://www.aint-it-cool-news.com/display.cgi?id=8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