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미국에서 <원령공주>가 개봉되기 이전인 98년 11월 <필름 코멘트>에 실린 글로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서구 관객들을 대상으로 그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소개하는 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에 이미 친숙한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아시아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시선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글이라 하겠다.
일본의 생태론적 환상주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마술사이며 새로운 세계의 건설자인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섬세하기 그지없는 상상 속의 비행기를 만들어 내서는 푸른빛으로 넘실대는 언덕의 풍경 속으로 힘차게 날려보낸다. 그리고 이제 그 비행기는 버려진 옛 성터의 우뚝 솟은 기둥들 사이를 누빈다. 이렇듯 마음껏 물건들을 날려보낼 수 있다는 애니메이션만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신선하리만치 솔직하고, 또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미야자키는 컴퓨터 그래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매 작품마다 전체 프레임 수의 최고 70퍼센트를 직접 그린다. 최근 일본에서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최신작 <원령공주>(1997)에서도 총 14만개의 프레임 중 8만개는 그가 직접 작업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컴퓨터 그래픽의 번들거리는 이미지 없이도, 일본 고대 찻잔 특유의 '유기적' 짜임새와 같은 수공업적 이미지만으로 관객들이 작품 속의 장소들이 실제로, 혹은 '가상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돌려 볼 수도 있고 뒤집어 볼 수도 있는, 다시 말해, 그가 만들어 낸 세계는 어떤 각도에서도 볼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입체적 전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원령공주>, 뚜렷한 `일본적` 색채로 포용되다
<원령공주>는 미야자키 자신의 프로덕션 회사인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작된 여덟 작품 중 하나로 디즈니사에 의해 내년 즈음 미국에 개봉될 예정이다. 이는 마술 왕국의 지배자 디즈니로서도 상당히 과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야자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가족 중심성과 행운담적 줄거리, 이상화된 유년시절 등을 고려할 때,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나 기발한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그의 작품은 분명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시대(1336-1573), 아름드리 나무들로 무성한 원시의 산림을 떠 올려 보자. 이 이교도적인 낙원은 강력한 철제 무기를 만들어낸 이웃 마을의 침략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영화 속에서의 이 기술적 도약은, 인류가 낡은 신들을 대체해 교활한 인간들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수세기에 걸친 '패러다임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신분 상승 욕구는 야만적인 의식을 통해 표출되는데, 그것은 그 숲의 지배 정령인 사슴신의 목을 베는 일이다. 물론 구질서가 싸움 없이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는다. 동물들과 숲의 정령들은 동조하는 몇몇 인간들과 연합하여 최후까지 저항한다. 여기에 무술 영화적 기개마저 느껴지는 <원령공주>는 결코 긴 머리나 나부끼는 단순한 뉴에이지 스타일의 생태주의 우화는 아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이 자연의 피조물들은 결국 그 이빨과 손톱에 피를 묻히고 만다. 숲의 정령들에 의해 길러진 여전사 원령공주는 흰 두목 늑대의 상처를 빨아주는 장면에서 처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피를 뱉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야구장의 2루수가 입 담배를 씹고 내뱉듯 무심하다. 예쁜 여주인공이 보여주는 이런 식의 터프함은 서구적 관념의 말괄량이 정도는 훌쩍 넘어선 것이 아닐 수 없다.
들리는 바로는 <원령공주>가 일본인들에게 기꺼이 포용된 데는 작품이 가지는 강한 민담적 요소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일본인들의 정체성을 밝혀 주는 이미지를 찾아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웃집 토토로>(1988)의 귀여운 동물들을 스스럼없이 껴안았을 어린이들도, 그 동물들의 친척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원령공주> 속의 빨간 눈 원숭이나 흉측한 마물 구더기에게는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원령공주>의 강렬함은 일본인들에게도 약간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미야자키가 여가 때면 항공잡지를 위해 가상의 비행기들을 수채화로 그려주곤 하는, 약간은 비행광인 기벽이 있긴 하지만, 전 경력을 통해서는 그는 늘 낙천적인 가족 오락물의 전달자로서 숭배되어왔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키운 것
미야자키는 평생동안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직업을 가졌지만, 영화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된 것은, 일본의 인기 있는 인쇄만화 산업인 망가(manga) 업계에서의 경험을 거친 이후이다.1941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아버지가 군수산업 엔지니어였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남들보다 풍족하게 지냈던 점에 대해 어린 시절 늘 죄의식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미야자키는 이후에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도에이 동화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장화 신은 고양이>(1969)와 같은 아동용 극에 간간이 참여했다. 그는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와 다카하타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 등과 같은 장편 극영화들에서 작가와 애니메이터로 작업했는데 이중 6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미야자키와 그 동료들이 가졌던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주의적 이상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다. '인류의 화합'을 축하하는 작품의 내용은 실제로 제작팀원들의 아이디어를 '민주적으로' 반영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카하타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후, 미야자키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는데 TV용 만화 <미래소년 코난>(1978)과 극장용 장편 <루팡 3세:카리오스트로의 성>(1979)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초기 작품들은 팀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면 전속 감독으로서 참여했던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놓은 캐릭터를 발전시킨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1980년에 일본의 잡지 <아니마게>(Animage)는 미야자키에게 그의 첫 번째 (그리고 아직까지는 유일한) 인쇄 만화의 연재를 부탁하는데, 이 만화가 바로 그가 나중에 극장용 극영화로 스크린에 옮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이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당시로서는 여러 면에서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었다. '미야자키'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성립되기 이전인 80년대는 변신합체 로보트와 초시공 우주요새의 시기였는데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얼마나 앞서나간 신선한 시도였는지는 기억할 것이다. '메카물'의 번쩍이는 금속과 날카로운 유리의 표면을 미야자키는 매끄런 식물과 곤두선 털로, 그리고 떠다니는 홀씨와 분출하는 홍수 등의 자연의 모습으로 대체한 것이다. 핵전쟁 이후 시대는 혼란스러우리만치 황폐한 황무지로, 거대한 벌레가 스물스물 기어다니고 그 벌레는 다시 유독성 기생버섯의 덩어리인 '부해'에 의해 삼켜진다. 남아있는 몇몇의 사람들은 주위 도시국가와 맞서 싸우며 산 속에 모여 살지만 그나마도 밀려드는 돌연변이 괴물들로 인해 파괴당할 위기에 처해져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생태학적 개념으로 보면 90년대의 서구 과학에서 유행한 '자생적 조직단계 시스템'이라는 테마를 미리 예견한 듯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에서 과학기술이라는 것은 기계들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자연의 재료를 얽어 만든 일종의 이미지적 유사품으로 대체된 체 사라져 버렸다 - 이건 마치 선승(禪僧)인 정원사에 의해서 재구상된 <고인돌 가족> 영화같은 것일 것이다.
제2의 시작, <천공의 성 라퓨타>
<애플시드>나 <공각기동대>를 만든 메카물의 고수 마사무네 시로우와는 달리, 미야자키는 자기 작품 속의 무기나 장치들에 열광하는 소년 팬들을 위해 굳이 주석을 달지 않는다. (비즈 커뮤니케이션은 4권 분량의 1000페이지가 넘는 설명서를 영문 번역으로 출간한 바 있다). 어떤 '기술적 설명서'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시각적 짜임새만으로 우리는 문명과 복장, 그리고 무기, 가구, 사회적 관습 등을 추론할 수 있다. 버섯 모양으로 진흙을 바른 인간의 집은 시각적으로 식물이나 곤충류의 모습을 부풀린 것과 같다. 작품의 시각적 핵심은 여주인공인 말괄량이 공주(미야자키는 두려움을 모르는 이런 여성 캐릭터를 몇 명 만들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이 여자다)가 타고 다니는 말벌같은 모양새의 글라이더인데, 여주인공은 이처럼 벌레들과 친구가 되고 바로 그 '부해' 안에서 새로운 재생의 근원을 찾는다.
이런 종류의 작품에는 마치 취미 생활자의 자잘한 기쁨과도 같은 것들이 많다: 조각조각의 잡동사니들로 꽤 멋진 모형비행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순수한 즐거움 말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는 산업화 이전의 기술로 산업주의적 과정을 유사하게 구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 마치 윌리암 깁슨과 브루스 스털링이 펑크 스타일의 대안 역사 소설 <다른 엔진>(The Different Engine) 속에 나오는 빅토리아 시대의 인공두뇌 고안물이나, 아니메에 대한 연대기적 영화 <로봇 카니발> 중 탁월한 에피소드인 기타 히로유키의 '두 로봇 이야기'에 나오는 증기동력의 사무라이 시대 인조인간처럼 말이다. <원령공주>에서 여자들이 팀으로 앉아 페달을 돌리는 철 주조 공장의 나무 변속기는 (이 역시도 매우 순수하게 가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이모 감독의 <국두>에 등장하는 나무 바퀴 염색틀을 떠올리게 한다.
미야자키의 두번째 영화에서도 인상적인 기구들이 많은데, 겉보기에는 마치 찌그러진 구 모델의 자동차를 닮아 보이게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로봇의 눈은 마치 에드셀 자동차의 석쇠를 옆으로 돌려 끼워놓은 것 같이 보인다). 유사 빅토리안 풍의 장식과 우스꽝스러운 해적 조연들, 그리고 유쾌한 비행장면들로 가득한 <천공의 성 라퓨타>(1984)는 아마도 미야자키의 작품들 중 가장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최고의 전투 조종사가 되는 쾌활한 돼지의 이야기인 <붉은 돼지>(1991)는 미야자키의 작품들 중 가장 멋진 비행 장면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지만 어떤 작품이든, 마지막 한시간 내내 구름 속을 헤엄쳐 다니는 <…라퓨타>의 그 아슬아슬한 재미에 대적하기는 힘들 것이다.
<…라퓨타>는 한편으로는 미야자키에겐 새로운 출발점이였다. 적어도 그것이 하늘에 떠있는 잃어버린 대륙에 관한 모험이라는 고전적인 '소년영화'였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미야자키 영화는 거의 항상 소녀들의 관점을 취한다. 그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어리숙하고, 세상과 만나 나가면서 자신의 힘을 테스트 받는 아이들이다. 원령공주는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나우시카에서 여주인공은 괴물인 오무로부터 정신적 신호를 받아 '부해' 속을 다니는 그들과 인류사이의 휴전을 중재하게 된다. 만약 미야자키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능력들이 파워레인져의 능력보다 조금이나마 더 진실되어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부분적으로는 그의 작품들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둘은 진정으로 은유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녀배달부 키키>(1988)에서 비행 능력은 태동하는 생명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인데, 주인공은 사춘기 때 겪게되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함께 일시적으로 그 능력을 잃고 만다. "난 내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당연히 생각했어. 이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겠어"라며 그녀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녀 마녀 키키가 비행선과 함께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서둘러 나갈 때 그녀의 잃었던 비행능력을 다시 되찾게 된다.
미야자키의 세계는 꼼꼼하다. 그는 각 부분들이 서로 제대로 맞물리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고대의 벽에 단을 쌓은 돌들이나 나무 잎들의 보드라운 움직임을 보라.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조감된 틴틴(Tintin)풍의 유럽식 배경은 (만약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럽의 어디에선가 실제로 찾을 수 있었을 풍경일 것이다)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역사적 구조물이나, 구역, 그리고 도로 계획들이 기가 막히게 배치되어 있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비행선이 정박되어 있는 바닷가 공원과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구조장면이 펼쳐지는 중앙 공원, 그리로 이 둘을 잇는 도로들을 조망할 수 있다. 이런 주위 환경과 <이웃집 토토로>에서의 시골풍경에 기울인 세심한 배려는, 마치 예전에 실재했던 한 도시의 완벽한 이면계획도 위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완벽히 환경적 조화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성에 대하여
자연계는 거대한 유기적 기계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된 사람이라면 그 답을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역에서 내부적 일관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사회 생태학이란 것은 어떻게 세상이 상호작용하며 돌아가느냐에 대한 좀 더 깊은 한 이해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미야자키 이야기 속의 세계들이나 생태계 자체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풍부하고 다양한 극적 진실을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모든 훌륭한 엔지니어들처럼 미야자키는 그의 내면을 뒤집어 보이며 그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그가 창조하는 것은 단순히 3차원적인 입체감을 조성하기 위해 움직임과 시간을 가미한 2차원 공간의 기능적 모델이 아니다. 그가 상상하는 것은 세상이나 기계의 외면적인 모습만이 아니고 그 내면까지도 포함된다. 그것들은 겉으로만 괜찮아 보여서는 안되고 실제로 제대로 작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개미>를 만든 애니메이터 팀 존슨은 "만약 당신이 (미야자키의) 그림들로 기계를 만들어 본다면 그들이 멋지게 보이는 만큼이나 진짜로 날아다닐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그냥 하나의 비행기를 생각하든 아니면 지구 전체를 생각하든지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내부적 일관성, 대칭,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흠집 없이 매끄러운 연결이 그것이다. "나는 이제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미야자키는 말한다번역=남수영, 권재현
L.A에 거주하는 필자 데이빗 슈트는 "이 글의 배경 정보의 대부분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훌륭한 웹사이트 www.nausicaa.net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