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박수가 있다.
운동회나 응원전의 337박수, 방청객의 짜고 치는 박수, 사이비 종교 교주의 호령에 따라 치는 맹목적 박수, 속옷 파는 아저씨의 ‘골라, 골라!’ 박수 등.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박수는? 상대의 경이로운 힘에 감동,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고 쳐대는, 아니 칠 수밖에 없는 ‘기립 박수’가 아닐까. <올드보이>가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때 멋졌던 사람은 박찬욱 감독이 아니었다. 작품의 경이로움을 인정하고 자발적인 기립 박수와 환호를 보내던 관객이었다. 나도 언젠간 그런 기립 박수를 쳐보고 싶었다.
지난 겨울, 기회가 한번 왔다. <프로듀서스>를 보러 갔던 것이다. 한물간 프로듀서가 작품이 망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히틀러의 봄날>이란 최악의 공연을 준비하지만, 공연이 흥행해 오히려 망한다는 줄거리였다. 여기에 최정원이란 배우가 나오고, 브로드웨이를 행복에 빠뜨린 최고의 뮤지컬코미디란 광고에 이끌렸다. 무대의 막이 오르자마자 나는 행복에 빠지기 위해 잠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양손에는 오리발을 끼고 피날레에선 기립하여 오리발 박수를 쳐주리라, 오늘 손 제대로 아파보자!
그러나 극이 중반쯤 진행될 무렵 난 오리발을 고이 벗었다. 섹시한 금발 미녀 ‘올라’나 최악의 게이 연출가 로저 드브리스를 보는 것은 곤혹스러웠다. 백치미나 게이를 수사하는 말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즐겁게 와닿는 이도 분명 있을 터. 하지만 소수자를 바라보는 내 감수성은 곧장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하이라이트인 <히틀러의 봄날> 공연의 대사들은 외계어처럼 들렸다. 대체 탱크를 뒤집어쓰고 행진하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잠시 유체이탈하여 티켓 값이 절실히 떠오르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사운드를 의심하게 되더니, 이내 공연 의도를 의심하게 되고 나중엔 내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극이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행복 대신 고민에 빠졌다. 박수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건강에도 좋다는데 그냥 쳐? 마주 잡은 두손은 서로의 몸을 애무할 뿐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결심했다. 그래, 박수칠 때, 몰래 떠나자!
드디어 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다시 나와 인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반전이 일어났다. 앞쪽에서 두세 번째 줄의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줄이면 R석. 옷차림만 봐도 공연을 보는 눈이 남달라 보이는 사람들이다. 잠시 뒤 도미노처럼 사람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럭셔리한 관전 포인트를 지닌 앞사람들은 럭셔리한 박수(두손을 45도 각도로 놓고 튕기듯 우아하게 치는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들의 한참 뒤에 앉아서 기립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공연장이 아니라 숲속에 왔군. 나는 피톤치드의 향기 대신 럭셔리한 향수들의 내음에 잔뜩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박수소리가 커졌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공연 때에도 그렇게 웃음이 크게 터지진 않았었는데. 궁금증이 더해갔다. 배우들끼리 키스를 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했을까? 나는 명동 한복판의 구경꾼이라도 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였다. 배우들은 극이 끝났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싱겁고 민망했다. 하지만 이왕 일어났는데 도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엉덩이가 가려워서 일어났다고 옆사람에게 해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을 연호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 상황에서 가장 납득 가능한 행동은 박수 치는 일뿐이었다. 짝짝짝짝짝. 그 순간 기립 박수의 비밀을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덕분에 박수는 쓰고 그 손바닥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