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번 신상옥 감독에게 말을 걸 기회가 있었다. 1997년 처음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때였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영화제작을 하고 있었고 <갈가메스>라는 어린이용 괴수영화를 들고 부천을 찾았다. 한눈에도 그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멋쟁이라는 충무로의 소문대로 오랜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와 스카프가 눈길을 끌었고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는 일흔 넘은 노인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생기를 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고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던 한국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배우 최은희가 앉아 있었다. 버벅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앞에서 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한국영화의 전설이 눈앞에 있는데 물어볼 것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은 소감은, 따위의 시시껄렁한 질문밖에 없었던 탓이다. 신상옥 감독의 작품 가운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외에 본 영화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기자를 하면 숱하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그 순간 나는 내 무식함이 들통날까 조마조마했다. 신상옥 감독은 뻔한 질문에도 자상하고 소상하게 답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거만하다 싶을 만큼 핵심적인 말 한두 마디를 내뱉는 식이었다. 그때 신상옥 감독 말의 요지는 지금은 제작할 돈을 벌기 위해 <갈가메스> 같은 어린이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만 조만간 정말 제대로 연출한 자기 영화를 선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투엔 자신을 역사의 유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배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다음 작품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인의 상가에서 만난 김수용 감독은 얼마 전 신상옥 감독을 만났을 때 함께 <왕의 남자>를 보러 가자고 했었다고 말했다. “<왕의 남자> 보면 그게 꼭 신상옥 감독 영화 비슷하거든. 신상옥 감독이 사극에서 잘했던 것이 보여요. 이야기가 꽉 짜여 있고.” 아마도 김수용 감독은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영상원 김소영 교수는 <근대성의 유령들>이라는 책에서 <연산군>에 대해 “전근대사회에서 아버지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좌절한 남자아이의 실패담”이라고 말했는데 영화를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왕의 남자>와 머지않은 거리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신상옥 감독의 유산이 그의 영화와 요즘 영화 한두편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계의 원로들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구가하는 요즘 영화계를 보며 신상옥의 시대를 떠올리곤 한다. 예를 들어 <씨네21>에 연재한 ‘한국영화회고록’에 쓴 이장호 감독의 증언. “1965년 당시 주식회사 신필름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영화사였다. 직원만 200여명이었고 모두가 월급제였다. 요즘 아무리 큰 영화사라고 해도 운전기사까지 포함해 고작 20명도 안 되는 데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오늘날 영화계가 꿈꾸는 어떤 이상이 그 시절 현실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한국영화가 90년대 중반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일깨운다. 이번호에 한국 영화사 연구자인 조영정씨가 쓴 글을 보면 신상옥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였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취재경험만 놓고봐도 60년대를 경험한 영화계 인사를 만났을 때 신상옥이라는 이름을 빼놓고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신상옥 감독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인상은 “멋있다”는 한마디로 축약된다. 감독으로서도, 제작자로서도, 삶에 대한 태도에서도, 사소하게는 옷매무새로도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신상옥은 그들이 영화계에 끌린 치명적 매혹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의 부고를 접하며 한 시대의 멋스러움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아마도 그 멋에는 영화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려 했던 꿈이 깃들어 있었으리라. 그 위대한 꿈과 멋이 떠난 빈자리는 너무도 커서 후대의 누구도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