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그만두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영화의 도입부, 한 소녀가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혹은 불안하게 묻는다. 소녀는 지금 시바사키고등학교의 문화제를 취재하는 동급생의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소녀의 표정은 무심하지만, 그녀가 내뱉는 말들에는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청춘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러니 영화가 시작한 지 채 몇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질문해보는 게 나을 것이다. 영화는 학창 시절의 마지막 문화제, 이 3일간의 축제를 통해 불안한 청춘들에게 어떤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던 걸까. 세상과 대면한 예민한 소녀들의 방황 따위는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화제에 참가하려고 연습 중이던 여학생 밴드가 내부의 갈등으로 해체될 위기에 놓인다. 드럼주자 교코(마에다 아키), 기타를 연주하는 케이(가시이 유우) 그리고 베이스를 맡은 노조미(세키네 시오리)는 보컬을 찾지 못해 걱정이다. 이들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서 유학 온 송(배두나)에게 보컬을 제의하고 송은 얼떨결에 수락하고 만다. 문제는 송이 노래는커녕 일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괜찮다. 이들에게는 모든 장애를 허물어줄 노래가 있고, 젊은 열정이 있고, 소녀들에게만 가능한 특유의 연대감이 있으니. 영화는 문화제 3일 전에야 급조된 이 어설픈 밴드의 연습과정을 따라가며, 특히 송과 일본 소녀들 사이의 어색하지만 재기발랄한 소통과정을 관찰하며,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녀들의 ‘한때’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그 ‘한때’는 더없이 유쾌하고 찬란한 시절이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소녀들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카메라는 소녀들이 마침내 행동을 결정하고 그 마지막 3일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준다.
무엇 하나 뛰어난 것 없는 소녀들이 밴드를 결성해,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어낸다는 기본 설정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평이한 구조에 생생함을 불어넣는 건 배우들, 특히 유학생 송을 연기한 배두나 덕분이다. 일찍이 <플란다스의 개>를 통해 배두나를 점찍어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선택은 적중했다. 그녀는 어색한 일본어와 어색한 한국어(배두나는 한국말을 구사할 때도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언제나 조금씩 어색하다)를 오가며 특유의 낯선 표정으로 자칫 진부해지기 쉬운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다. 더욱이 1980년대 활동했던 일본의 펑크록 밴드 ‘블루하트’의 ‘린다 린다’가 약간은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외침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시궁창의 쥐”(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아무래도 일본 학교 속의 한국인 소녀, 청춘영화 속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박치기!>처럼 한-일관계를 전면에 부각하거나 특정한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의 초점은, 국적을 뛰어넘은 ‘여고생’의 이야기이다. 그저 일본 학교 안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을 뿐이며, 문화제의 일부로 매우 무의미한 한-일 문화교류전이 열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일본과 한국 학생들의 만남에서 어떤 민족적, 문화적인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제거하고 이들의 교류를 개인 대 개인의 만남 혹은 같은 세대의 만남으로 전환시킨다. 이를테면, 한-일 문화교류전은 파리가 날릴 정도로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유학생 송은 언어나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음악으로 혹은 또래의 감수성으로 일본인과 어울리는 법을 터득한다. 또는 송을 짝사랑하는 일본인 남학생과 송이 비품실에서 나누는 가장 사랑스러운 대화장면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잘 드러난다. 일본인 남학생은 어렵게 외운 한국어로, 송은 어색한 일본어로, 그러니까 서로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닌, 사랑의 고백, 세상에서 가장 내밀한 언어의 이야기를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그려놓고 한-일관계를 주장하는 표면적인 교류의 방식 대신, 민족, 언어적 정체성을 제쳐두고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공통적인 감수성을 통해 만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방식은 분명 새롭고 긍정적인 시작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시선이 그만큼 이상적인 순진함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로 읽히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소녀들의 뒷모습이 유달리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즉 앞을 바라보며 서 있는 소녀들의 뒤통수를 찍는다. 예컨대, 연주 전날, 송은 무대 위, 눈부시게 하얀 벽면 앞에 서 있다. 카메라는 송을 정면으로 비춘다.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송의 뒤통수를 비추는데, 이 때, 송이 바라보는 앞, 즉 관객석은 무대 위의 하얀 벽면과 반대로 깜깜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내 뒤의 지나간 시절들은 찬란하지만, 내 앞에 다가올 현실은 어둡고 두려운 것.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무대 위에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존재하므로. 의미를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다 함께 노래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학생들이 떠나 텅 빈 학교의 풍경들을 카메라가 홀로 둘러볼 때에도, ‘린다, 린다’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추억처럼 소곤소곤 퍼진다. 영화는 이렇게 소녀들의 ‘한때’에 생명력을 안겨주려고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무심한 소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던, 그 개별 청춘의 고독한 철학은 어느새 존재를 감춘다. <린다 린다 린다>의 밝고 쾌활한 힘인 동시에 최대의 약점이 있다면, 그건 이처럼 철모르는 낭만적 시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