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들>은 96분을 단 하나의 테이크 안에 담은 영화다. 한해의 마지막 밤. 강원도 산장으로 세 친구와 한명의 이방인이 찾아든다. 3년 전 자살한 친구, 자은을 추억하던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 이를 실연하는 것은 배우들이요, 이를 구상한 것은 송일곤 감독이었지만, 화면을 결정지은 것은 박영준 촬영감독이었다. 사전에 세팅된 상황에 따른 커다란 움직임과 별도로, 인물의 말 한 마디, 미세한 동요에 주밍과 흔들림으로 반응하는 카메라의 세세한 시선은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와 함께 정교한 부분 리허설을 거듭했고, 감독과 촬영감독이 무전기를 통해 매 순간 교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른 화면은 어딘가 인위적이었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감독은 촬영감독을 그저 믿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촬영은 박영준 촬영감독이 송일곤 감독의 촬영감독이기 이전에 믿음직한 친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용인대학교 연극영화과 시절, <소풍>의 후반작업을 위해 학교를 찾은 송 감독을 만난 이후 박영준 촬영감독은 촬영부로 <꽃섬>에 합류했고, <깃>의 촬영감독이 되었다. <거미숲>을 보면서 “감독 의자에 꽁꽁 묶여서 영화를 찍은 친구의 모습”이 느껴져 안타까웠던 그를 향해, 송 감독은 “제주도에 가서 바람을 담아보자”는 메시지를 전송했다. <깃>은 그에게 있어, “사랑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는 자유”와도 같았다. 열흘간의 촬영기간 내내 강풍기는 물론이고, 발전차며 기본적인 조명 장비도 사용할 수 없는 저예산영화의 시나리오에는 “멀리서 태풍이 다가온다”는 식의 무책임한(?) 지문이 난무했지만, “태풍? 뭐 곧 오겠지”라며 그는 한없이 낙천적이었다. 두 주인공이 제각기 태풍 속을 헤매는 장면을 위해 실제 태풍을 기다렸다. 감독과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메고 헤어져 15분 만에 이를 찍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박영준 촬영감독을 가장 행복하게 했던 것은, 촬영 내내 더없이 편안해 보이는 감독의 모습이었다.
“자연 상태의 시골에선 도시와 달리 진정한 소멸, 즉 어둠을 느낄 수 있다.” 그 미묘한 감각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박영준 촬영감독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 사라진 뒤 어둠이 미처 사위를 덮지 못한 시간을 <깃>의 오프닝에 담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우도의 풍광을 프레임에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그의 목표는 단 하나. “공간과 인물에게 솔직해지는 것”이었다. 그곳의 절경을 한눈에 굽어보고픈 욕망은 촬영감독에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의 카메라는 내내 인간의 시선을 고집한다. 대상을 향한 이 예사롭지 않은 겸손함은, 2년 동안 지리산 자락 대안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그의 이력에서 비롯됐다. 경제적인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상적이라 여기는 삶의 방식을 테스트하고 싶어 선택한 전원생활은 그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했다. 자연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도시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그는,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35kg에 달하는 카메라 장비를 몸에 부착한 채 연출자의 눈이 되어야 하는 <마법사들>의 촬영감독으로도, 그는 더없는 선택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친구들을 소개하는 자은의 영혼을 따라가는 제3자의 것이라고 정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 너무 유려하거나 지나치게 흔들려서도 안 되는, 미묘한 움직임을 향한 그의 태도는 실로 엄격했다. 촬영자와 배우의 사적인 거리가 카메라와 영화 속 인물의 거리감까지 좌우해선 안 되기에, 배우와 친해지는 것까지 경계할 정도였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면서, 마음껏 뛰어노는 게 좋다. (<깃>이나 <마법사들> 같은) 작은 시스템의 영화를 만들면서조차 작가의 생각을 제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감독의 자유분방한 스케치를 스크린에 옮기는 것이 촬영감독의 몫이라고 믿는다. 로미 뮐러, 네스토르 알멘드로스 그리고 김우형. 그가 존경하는 촬영감독들 역시 영화의 내용과 연출 의도를 최우선으로 이를 표현할 기술을 고민했던 이들이다.
다소간의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박영준 촬영감독은 영화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에게 영화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가르쳐주는 소중한 매개체다. 지금도 촬영보다는 사람 혹은 친구에게 관심이 많다는 그는, 끊임없이 관계를 고민해야 하는 학문이기에 건축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오직 인간을 향하는 그의 속깊은 눈썰미는,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과 조명 하나에도 달라지는 배우의 반응을 눈치채곤 한다.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반영되는 사려깊음. 욕심과 능력을 겸비한 연출자라면, 그를 탐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