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냄새 밴 일상을 반듯하게 닦아내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가녀린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흰 치마를 하늘거리는 판타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철없는 가족을 생활로 이끄느라 악다구니를 퍼부으면서도, 피아노 앞에 앉아 남자들을 구원의 여인에 대한 환상으로 취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율배반적인 연기가 가능한 한줌의 배우를 떠올리면, 어슴푸레 잔향으로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이따금 연극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곤 하던 김호정이 긴 휴지부를 마치고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 <피터팬의 공식>으로 안부를 물어왔다. <꽃피는 봄이 오면> 이후 오랜만의 봄나들이다. 10년 동안 감독 지망생인 남편을 거둬먹이는 악바리 무용학원장(<모두들, 괜찮아요?>)이면서 동시에 밑바닥까지 내려간 고등학생에게 구원의 여인으로 다가온 음악교사(<피터팬의 공식>)로서 말이다.
-2001년 <나비>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받은 이후 그리고 2004년 안톤 체호프의 연극을 하면서 인터뷰한 뒤로는 정말 오랜만에 인터뷰 자리에 나온 것 같다. 너무 뜸했다. =영화를 몇편 안 했다, 뜸한 게 아니라. 그런데 지난해에만 세편을 찍었다. <모두들, 괜찮아요?>와 <피터팬의 공식>, 일본에서 9월 개봉예정인 일본영화 <캐치볼>. 그리고 지난해 말엔 체호프 연극 <갈매기>도 했으니 많이 한 거 아닌가. 그렇게 일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알겠지만(그는 연극으로 시작한 관록의 배우지만 연극도 1년에 한편 정도의 과작이다).
-뜸하긴 하지만 영화를 계속 해왔는데도 낯가림이 있다. 인터뷰도 잘 하지 않고. 이번 인터뷰도 약속 잡기가 어려웠다. =지금 연습 중인 연극 <미실> 일정 때문에 그런 거지 왜 안 하고 싶겠는가. 극단이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한다. 이번 연극이 (양정웅 연출가와의 작업이라서) 신체를 무척 많이 쓴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바닥에서 구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니 내가 빠지면 안 되는 거다. 시사회에 참석하느라 두번 빠졌는데 너무 미안해서 안 되겠더라. 여전히 낯을 가리기는 한다. 이제는 이해력이 생기는 것 같다. 낯가림도 다 젊을 적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다. 이제 (나이가 드니) 상황을 전반적으로 보는 이해가 생긴 것 같다.
-<모두들…> 이야기부터 하자. 어떻게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나. =시나리오가 좋았다. 처음엔 이런 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야기가 강한 것도 아니고 짠한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거라서. 아, 그런데 그게 매력이더라. 친구 중에 감독 아내들이 많다. 감독들 만나보면 자기의 연애와 결혼생활을 모델로 삼은 사람이 많다. <플란다스의 개>도 사모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봉준호 감독에게 부탁해서 만난 뒤 친해졌다. 감독의 부인들은 감독이 얼마나 힘든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꽃피는 봄이 오면>도 감독의 실제 애인이 모델인데 마찬가지로 알고 지내게 됐다. 감독 부인들이 감독보다 날 더 좋아한다. 질투도 하지 않고. (웃음) <모두들…>에서 감독 지망생 부인 역인데 그래서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고 초조한지 잘 알고 있었고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민경(<모두들, 괜찮아요?>의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나. =어렵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다. 영화상으로는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감독은 부부싸움 장면에서 더 힘을 주라고 주문했다. 함께 영화를 본 가족들은 ‘오버’ 아니냐고 했고 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감독은 분명하게 그렇게 끝까지 갈 정도로 싸우는 게, ‘쎄게’ 가야 하는 게, 옳다고 했다. 무용학원장 연기를 위해 실제로 가르치는 걸 보러 다녔고, 영화 속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정말 무용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그 아이가 배우는 걸 죽 지켜보았다.
-정말 저렇게 오랫동안 감독 지망생만 하고 있는 남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현실이 아니란 걸 감사히 생각한다. (웃음) 민경으로서는 사랑하고 결혼할 때는 몰랐겠지만, 처음 사귈 때는 장점이었던 낙천적인 게 좋았겠지. 살다보니 나중에 오히려 그게 더 힘든 부분이 된 거고.
-오랜만에 영화 찍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 같다. =작업과정은 너무 좋았다. 감독도 내공이 있고, 영화 촬영도 아기자기하고 즐거웠다. 예전엔 몰랐는데 처음으로 현장에서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고 편하게 지냈다.
-전반의 연기와 후반의 연기 톤이 조금 다르다. =전반 부분을 편집하면서 잘려나간 게 있어서 ‘세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민경이 집안을 꾸려가면서 안팎으로 힘들어하는 부분이 쌓여가면서 그런 연기가 나온 건데, 앞부분 연기가 추려져서 그랬나보다. 오히려 난 후반에서 경직된 연기가 잠깐 있어서 속이 상했다. 관객은 이야기 흐름에 묻혀서 가니까 그건 알아차리지 못하더라.
-병국(극중 민경의 아들)이는 아프고, 남편과 아버지는 각자 집을 나가는 황당한 상황 속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을 때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신경 쓰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편안하게 찍었다. 시나리오를 보면 군더더기가 없다. 군더더기가 있으면 불편했을 텐데 그 장면은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한 거다.
-체호프의 연극을 할 때 가장 아름답고 어울리는 것 같다. 남선호 감독 작품을 한 것도 그가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 아닌가. =그분이 내공이 있다고 한 건 연극 경험도 있고 드라마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연출할 때 보면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명확하게 상황을 간파하고는 좋은 쪽으로 날 설득해서 최상의 것을 뽑아낸다.
-즉흥적으로 연기를 만들어가는 편인가. =작품마다 다르다. <플란다스의 개>는 핑퐁게임처럼 정확하게 대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그런 영화에 애드리브를 치면 안 된다. <모두들…>에서는 무용학원에서 학생을 혼낼 때 모두 애드리브를 했다. 시나리오엔 한두줄로 ‘소리친다’고 되어 있는데, 그 장면의 애드리브를 만들려고 무용학원에 드나들며 보고 배웠다. 무용선생님이 쓴 말을 다 입력한 뒤에 내가 나중에 뽑아 쓴 거다. 제작진에게는 안 보여주다가 현장에서 촬영할 때 보여주고 두번 만에 촬영을 끝냈다. 그 배역 안으로 들어가서 치는 애드리브는 언제나 찬성이다. 그렇지 않고 불편한 상황에서 하는 애드리브는 반대다. 난 언제나 작가를 존중해주고 싶다.
-배역 속으로 들어가는 메소드 연기자에 가까운가 아니면 장인으로서의 연기자에 가까운가. =메소드는 기본이고. 20대 때는 그런 걸 많이 생각했다. 이젠 잘 느끼면서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재능과 자신감과 열정이 문제인데, 예전엔 엄청나게 자신감이 있었다. 무지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건 20대 때 끝났다. 30대 넘어서는 더 힘들어졌다. 더 많이 느끼고 관찰해야 연기가 나온다. 언제까지 재능과 열정만으로 갈 수 없다. 나는 내 연기로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고 싶다.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려면 내 영혼이 가난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나.
-2년 전 당신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적이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얼굴을 돌릴 때마다 다른 얼굴이 나오더라. 이번 영화에서 그런 걸 감안해준 것 같지는 않다. <피터팬…>은 뒷덜미 하나에도 환상적인 면을 부여하던데. =맞다. <피터팬…>은 아주 힘들 때 찍었는데도 그렇더라. <모두들…>은 내가 예쁘게 찍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냥 카메라 앞에 내 얼굴을 들이댄 것 같은데. 나도 여배우니 그렇게 찍히면 화들짝 놀라기는 하는데, 이번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과작인데, 이번엔 <피터팬…>도 함께 찍었다. =동시에 제안이 들어왔다. 한편 하면 쉬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모두들…>을 기다렸다가 찍겠다고 하더라. 감독이 꼭 하자는 거다. 거절했는데 <나비>를 만든 문승욱 감독이 차 한잔 마시자며 계속 전화를 했다. 나갔더니 상황이 그게 아닌 거라. 영화사 대표도 나와 있지, 감독도 나와서 기다리지, 예전 같으면 경기 일으키고 도망갈 상황인데. 뭐 내가 그런 대단한 배우라고.
-피아노는 직접 치나. =내가 피아노를 전혀 못 친다. 배우느라 너무 스트레스였다.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특정 구절을 지정해주면 트레이너를 붙여서 연습했다. 그 장면만 주야장천 연습 하는 거다.
-출연한 연극과 영화를 통틀어 ‘자위했니’란 대사는 가장 전압이 높은 대사였다. =감독한테 첫 질문을 바로 했다. ‘이거 꼭 해야 돼요? 너무 세요.’ 걸리는 건 꼭 직접 얘기를 한다. 현장에 다 알고 들어가야 하니까. 감독 왈, 꼭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대사의 문장 순서 바꾸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씩 얘기를 하곤 했으니. 감독은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그걸 명확하게 디렉션했다.”
-누드 연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수월하게 찍었다. 내가 까다로운 걸 아니까 같이 콘티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찍었다. 내가 아니라 온주완이 상처를 받은 것 같던데. 자위장면 같은 경우가 그런데 나는 등을 돌리고 옷을 입고 있고 온주완은 벌거벗고 누워 있지 않나. 그 장면을 찍고는 그냥 나가버리더라. 나중에 얘기를 나눠봤더니 ‘누나, 제가 예민해요’ 이러더라. 남들 앞에서 발가벗긴 느낌이 있었겠지. 나는 ‘네가 그러니까 난 말도 못 꺼내겠다’ 그랬다.
-남자들에게는 <피터팬…>의 음악선생 같은 이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 입장에서는 그 아이를 좋아하는 걸까. 실제상황이라면 어떻게 그 아이를 도와주겠나. =그런 건 이해할 수 있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모성애든 도와줄 수 있는 거다. 그 사람이 싫어서는 도와줄 수 없는 거니까.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가능했겠지. 난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다. 대학 마치고 중학생인 동생이 뭘 좀 학교에 갖다달라고 해서 간 적 있는데, 애들이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비명을 지르더라. 굉장히 민망하더라고. 쟤네들이 날 여성으로 대하는 걸까. 북촌에 사니까 가끔 떡볶이 사먹으러 중앙고등학교 근처에 가는데, 내가 들어가니까 애들이 우르르 나가더라. 쑥스러워 그런 거지. 난 주인 아줌마한테 미안하다고 그러고. 그렇게 날 의식하나? 날 아줌마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매번 연기마다 목소리와 연기가 너무 다르다. 자신이 보기에도 자기 내부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그런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만들어서 연기하지 않는다. 순간에 치중하는 것뿐이다. 배우들이 다 그렇지 않나. 열다섯살부터 마흔살까지 모든 연령대가 다 들어 있다. 누구나 제 삶을 비춰서 하는 거다. 그러니 내 안에 전혀 다른 인물이 있을 수 없다. 자신감을 갖고 표현할 뿐이다.
-지금 준비하는 연극은 뭔가. =<미실>이라고 극단 여행자의 양정웅과 함께하는 건데, 4월24일부터 공연이다. 어려서부터 색을 전수받아 숱한 남자들을 거느린 미실이라는 여인 역을 맡았다. 그런데 단순한 권력과 질투로 엮인 극이 아니다. 남자들을 잘되게 돕고 나중엔 화랑의 우두머리인 원화자리까지 올라 국사를 돕는 여인이다.
-지적인 풍모와 색스러운 여자라. 언뜻 그림이 안 떠오른다. =색스러운 역이 어떨 거라고 생각하나.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 한국사회는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였던 듯하다. <미실>에선 색이 색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미실은 신비롭고 큰 여자고 현명한 여자다. 배우에겐 그런 게 있지 않나. 너무 그런 쪽이 아니니까 오히려 더 해볼까 하는. 보통 지적인 여자와 색스러운 여자를 가르고 규정하는데 미실은 음한 기운만 있는 게 아니다. 연습하느라 힘들다. 종일 구르고 있으니까. 대사도 날아다니면서 한다.
-의미있는 작품을 두개나 했는데 표정이 밝아만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과 함께 보러 나갔는데 <모두들…>이 교차상영하더라. 괴로움이 컸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나 같은 배우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왜 내 팬들을 영화가 걸린 극장을 찾아 헤매게 해야 하나.
-가끔 북촌에 산책을 다니면 혹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전에 살던 곳에서 조금 내려왔다. 감사원 아래쪽인데 조금 더 넓은 한옥으로 왔다. 삼청동이 굉장히 번잡해졌다. 평일에만 마을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