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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본격 제작 시작 [1]
사진 오계옥문석 2006-03-29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마침내 날갯짓을 시작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촬영을 마쳤어야 할 이 영화가 캐스팅 문제로 투자에 난항을 겪으면서 지난해 12월 제작이 중단됐다가 지금에야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3월11일 전라남도 장흥에서 열린 제작발표회는 <천년학>의 성공적인 재기를 알리는 팡파르였다. <씨네21>은 올해 말 또는 내년 초까지 계속될 이 천리 길의 첫 한 걸음을 따라잡았다. 다음날 이뤄진 제작진의 광양 매화마을 세트장 방문 모습과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도 함께 전한다.

“쩌기가 임권택이란 양반 아녀.” “오정해네, 창 하는 오정해. 고 옆엔 조재… 뭐여?” 어둠을 헤치고 출발한 버스가 6시간 넘게 걸려 닿은 작은 마을은 장터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100여명의 취재진과 영화 관계자를 제하더라도 100명은 족히 될 인근 주민들이 바닷가 제방가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이날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산저마을이 축제분위기로 들썩였던 이유는 인근에 나붙은 플래카드가 설명해준다. ‘경 임권택 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 축.’

‘경 임권택 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 축.’

<천년학>의 주막 세트가 차려진 여기서 제작을 축하하는 고사를 지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에 해당한다. 아버지에게 시달리다 집을 뛰쳐나간 동호가 마음속에 연정을 품고 있던 이복누이 송화를 애타게 그리며 찾아 헤매는 과정이 한축을 이루고,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눈이 먼 송화가 아버지를 여의고 겪는 온갖 세월의 파랑이 또 하나의 축을 만들게 된다. 이 영화에서 주막은 핵심적인 공간이다. 여기는 동호가 송화를 찾다 못해 마지막으로 발길을 향하는 곳이며,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는 곳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북소리와 누이의 소리가 합일을 이루는 곳이다. 이 마을은 <천년학>의 원작 <선학동 나그네>가 쓰여진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건너편에서 어린 날을 지냈던 작가 이청준은 이곳 뒤편에 자리한 산이 바다에 반사되면 비상하는 학을 연상케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다. 이날 주민들의 흥겨움에는 김덕수가 이끄는 한울림 예술단의 장단이나 이름난 감독과 배우의 출현뿐 아니라 거장이 만드는 영화의 주된 무대가 마을에 꾸려졌다는 사실도 추임새를 넣었을 것이다.

조재현, 임권택 감독의 새 얼굴

‘주최쪽’에서도 유난히 상기된 표정을 보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행사의 주빈이라 할 수 있는 임권택 감독이었다. 작품을 앞두고 있을 때면 눈가에 영화에 대한 고민이 담긴 주름을 드러내곤 했던 임 감독은 이날만은 시종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지신과 천신 그리고 해신에게 무사안녕한 촬영을 기원하는 제례 도중에도 그의 표정은 엄숙함보다는 들뜬 쪽에 가까웠다. “이제 일을 시작하니까. 사실 정신적인 타격도 좀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좋은 쪽으로 되고 있다.” 스타급 캐스팅이 안 됐다는 이유로 투자사가 돌연 투자를 철회하고, 제작사마저 포기를 선언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만큼 새 출발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다는 얘기다.

임 감독을 흐뭇하게 만든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는 이날 처음 소개된 남자주연 조재현이다. 제작사를 태흥영화에서 키노투로 옮기면서 스탭과 배우를 모두 재검토했던 임 감독은 남자주인공 동호 역에 조재현을 낙점했다. 조재현이 캐스팅된 과정은 알려진 바대로다. “<천년학>이 엎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키노투 김종원 대표를 통해 임 감독님께 아무 역할이나 맡겨달라는 뜻을 전달”한 조재현에게 “그럼 아예 주연을 맡기겠다”고 화답한 것이다. 여기에는 “젊은 날 <안개마을> <티켓> <만다라> 같은 리얼리즘 계통 영화를 너무 좋아했고, 6년 전 개인 카페에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은 연출자로 임권택 감독님을 꼽았던” 조재현의 바람과 “TV와 영화에서 연기를 보고 언젠가 꼭 한번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임 감독의 희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덕도 있었다. <서편제>를 포함해 네 번째 작업을 함께하게 되는 오정해와 시각장애인인 송화의 눈 역할을 해주는 앵금 역을 맡은 아역배우 출신 신지수에 대한 믿음 또한 임 감독의 입꼬리를 자꾸 치켜올리게 했을 법하다.

<천년학> 어떤 이야기인가

30년에 걸친 소리꾼 남매의 운명적 사랑

1970년대 초반, 명고수(鼓手)로 알려진 동호(조재현)가 30년 만에 회진 포구를 찾는다. 30년 전 산 아래로 바닷물이 들어와 산의 그림자가 학 모양을 이뤄 떠올랐던 모습을 기억하며 이곳에 온 그는 현재는 방파제로 물이 막혀 산 아래로 물그림자가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과거 아버지와 누이 송화(오정해)와 함께 묵었던 주막을 찾아 주인인 용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송화가 아버지 유봉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송화는 득음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

이제 동호는 과거를 회상한다. 동호는 송화를 소리꾼으로 키워내려면 자신이 고수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창극단에 들어가 조 명창의 조수가 됐었다. 그 와중에 동호는 창극단 소리꾼 단심의 유혹에 넘어가 동거를 하기에 이른다. 얼마 뒤 송화와 동호는 어렵사리 조우하지만 동호와 단심의 관계를 알게 된 송화는 충격을 받은 듯 떠나간다. 백사 노인의 첩이 된 송화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명창에게 교섭을 받으며 소리를 닦아가지만, 노인이 죽자 고향인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얼마 뒤 동호는 송화를 찾아 제주로 간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격렬한 정사를 나누지만 송화는 떠나간다.

동호는 기약없이 떠난 송화를 기다리며 풍광 좋은 곳에 집을 마련하지만, 송화는 여전히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애태우던 동호는 다시 송화를 찾아나서고 주막에 들른 것도 그 때문이다. 동호의 이야기를 듣던 용택은 송화로부터 받아 간직하고 있던 유봉의 유품인 북을 동호에게 전한다. 동호가 그 북을 울리자 어디선가 송화의 소리가 들려오고 막혔던 바닷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내 산의 물그림자가 떨어지더니 학이 훨훨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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