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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의 미카엘 하네케 [2]
김도훈 2006-03-28

코드3 - 미디어/ 하네케는 미디어를 믿지 않는다

<히든>

하네케 영화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TV를 본다. <일곱 번째 대륙>의 가족은 죽어가는 순간에 TV 수상기에서 흘러나오는 팝송(<Power of Love>)를 듣는다. <베니의 비디오>의 베니는 도살당하는 돼지를 담은 테이프를 반복적으로 본다.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도 TV는 끊임없이 네오나치의 살인과 장난감 광고와 전쟁영화를 방영 중이다. <히든>에서도 거실에 켜져 있는 수상기에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계적 폭력의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한다. 보스니아 학살현장을 담아온 <미지의 코드>의 포토 저널리스트도 아내와의 소통에서는 실패할 뿐이다. “미디어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의식을 교란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네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TV계에서 17년을 일했고, 그 경험으로 인해 TV의 무용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97년에 카프카의 <성>(城)을 TV용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하네케 초기작의 배우들이 모조리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의외로 원작의 충실한 각색이다. “<성>은 TV용 영화다. TV를 위한 영화는 책에 가까워야만 한다. 왜냐면 TV영화의 목적은 관객에게 문학을 통역해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TV는 결코 어떤 종류의 예술도 아니다.”

코드4 - 롱테이크/ 하네케는 실제 시간으로 향한다

하네케의 작품 중 미학적인 구조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우연의…>와 <미지의 코드>일 것이다. <우연의…>는 71개의 분절된 신으로 주인공들의 일상을 따라가고, <미지의 코드>는 <우연의…>의 형식을 반복한다. 여배우와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 포토저널리스트, 루마니아에서 온 불법 입국자들은 서로 알거나 모르는 채 영화 속에서 지나치거나 만난다. 하네케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27개의 독립적인 시퀀스에 담는데, 대부분의 시퀀스는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 플랑세캉스다. 그리고 각각의 시퀀스는 급작스러운 암전으로 서로를 건너뛴다. 이는 영화의 주제인 ‘개개인의 사회적 소통의 실패’를 미학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내려는 야심찬 시도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

<미지의 코드>

<미지의 코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프닝이다. 주인공인 앤(줄리엣 비노쉬)과 남자친구의 동생이 만나고 헤어진다. 동생은 지나갔던 길을 거슬러 걸어가다가 루마니아 출신의 여인을 모독한다. 이에 발끈한 흑인 남자가 동생과 싸우고, 경찰과 앤이 소란을 듣고 달려온다. 오프닝은 수평 트래킹으로 찍힌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졌다. “<미지의 코드>에서 각각의 숏은 한 가지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관객을 속이거나 보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언제나 교묘한 조작이다. 그러나 만약 각각의 신이 단지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캐릭터가 ‘실제 시간’에 좀더 가깝게 머물 수 있고, 관객의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기당하지 않는다. 몽타주를 극도로 최소화하는 것은 관객이 좀더 심사숙고해서 화면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코드5 - 역사의 묵시록/ 하네케는 서구의 윤리적 부채를 조소한다

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안겨준 <피아니스트> 이후, 하네케는 <베니의 비디오>보다도 먼저 각본을 써두었던 <늑대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일종의 묵시록적 SF다. 일가족이 시골의 별장에 도착한다. 별장은 이미 낯선 가족이 차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게다가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재앙이 세상을 덮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이자벨 위페르)와 딸과 아들은 이제 전기도 물도 없는 자연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늑대의 시간>은 관객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재앙인지, 그들이 있는 장소는 어디인지, 모든 정보는 차단된다. “무엇이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집어넣었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당신이 재앙에 대한 단단한 이유를 찾는 순간, 관객의 시선은 곧 그들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일상적이지 않은 재앙에 처했을 때 행하는 집단적 행동이다.” 하네케는 <늑대의 시간>을 통해 서구 유럽인들로부터 물질적 토대를 빼앗아 던진 뒤, 당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이민자들의 고향에서 살아보니 기분이 어떠시냐고 이죽거린다. 서구인의 얄팍한 윤리가 쉬이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하며 조소를 보내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늑대의 시간>

<히든> 역시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조르주의 부모는 ‘1961 파리 대학살’(박스 참조)에서 부모를 잃은 알제리 고아 마지드를 입양한다. 아마도 그것은 중산층 가정이 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 조르주는 계략을 꾸며 마지드를 쫓아내고,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테이프를 보낸 자가 마지드라고 생각한다. 소년 시절의 악몽은 여전히 프랑스 중산층 지식인들의 부채로 남아 밤마다 침대를 적신다. 어떻게 보면 <히든>을 ‘하네케의 포스트 9·11 영화’라고 일컫을 수도 있을는지도 모른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불타오르는 TV화면을 보며 자신의 안방이 쉽게 침범당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의 공포와, 자신의 집이 찍힌 테이프를 보고 공포에 떠는 조르주, 그들은 다같이 항변한다. 도대체 왜 그들은 우리를 향해 분노하는가. 하네케는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답한다. 당신들이 짊어진 식민지배와 학살의 부채는 영원히 살아서 당신을 지켜볼 것이라고.

하네케는 예술가를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라고 말한다. 과연 <일곱 번째 대륙>으로부터 <히든>에 이르기까지, 하네케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식과 공포를 까발려낸다. 게다가 하네케는 주제를 담아낼 적절한 미학적 게임의 규칙을 만든 뒤에 관객으로 하여금 참여를 권한다. 해답없는 게임은 답답하지만 적극적으로 게임에 참여한 관객은 생각없는 소비자로부터 능동적인 비평가로 변모할 것이다. 그것은 “급진적으로 해답을 부정할 때, 관객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나설 것”이라는 하네케의 믿음이다. “하네케야말로 관객을 지성적인 존재로 대하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라는 <시네아스트>의 호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관객을, 당신을, 우리를, 그와 동일한 지성체로 바라본다. 그래서 하네케가 제의하는 게임은 결코 선동이나 윤리강의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네케의 게임은, 고통스럽지만 지적인 영화적 유흥(Funny Game)이다.

<히든>의 역사적 배경, 1961년 파리 대학살

40년 전 그날이 <히든> 속 사건을 불렀다

1961년 10월17일의 파리. 수천명의 알제리 이민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주도한 이 시위는 알제리인들에게만 부여된 통금령을 해제해달라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총기로 무장한 파리 경찰과 특공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결국 200여명의 알제리인이 잔인하게 학살당해 센강으로 던져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경찰과 시민들이 잔혹한 진압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모든 항의를 묵살했다. 이후 프랑스 경찰은 무력충돌이 우연에 의한 것이며 단 3명의 알제리인만이 진압과정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학살은 2차대전 중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에 의해 명령되어진 것이었다. 그는 직접 경찰 고위간부들을 불러 살인도 불사하는 초강경 진압을 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세기 서구사회가 저지른 가장 섬뜩한 죄악 중 하나인 이 사건은 프랑스 정부의 철저한 검열과 주류 언론의 자의적인 은폐로 오랫동안 함구되어졌다. 파리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1998년에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가 학살극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부터다. 학살극의 중심인 생 미셸 다리 근처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패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껏 단 한명의 학살 가담자도 정식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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