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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를 기다리는 순백의 도화지, <방과후 옥상>의 김태현
사진 오계옥정재혁 2006-03-23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김태현은 자상하기 그지없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찌개를 끓였고, 출근하는 조 사장(천호진)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었다. 동성 커플의 느끼함이 닭살을 넘어 로맨스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김태현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버린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그는 어느새 극중 인물로 변해 있다. “저는 연기를 계산하지 않아요. 그냥 제 모습에 캐릭터를 입히려 하죠. 진심어린 연기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서 김태현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는 <돌려차기>에서 철딱서니 없는 양아치 정대로 출연하더니, <청연>에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행사, 강세기로 나타났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보는 게 좋아요. ‘얘가 쟤야?’ 할 때, 정말 쾌감을 느끼죠. 그런데 꼭 알아보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방과후 옥상>, 그는 또 한번 관객을 의문에 빠뜨린다. ‘왕따 친구’ 궁달(봉태규)의 조역자 마연성은 잔머리 하나로 학교생활에 적응해가는 얌생이. 그는 이 역을 위해 ‘밭고랑 머리’를 하고 동그란 안경을 썼다. 웬만큼 예리한 눈썰미가 아니라면 마연성, 강세기, 민태현(<내 생애…>)을 한 배우가 연기했다고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극중 마연성처럼, 김태현에게도 왕따 시절이 있었다. 30기 MBC 공채 탤런트 출신인 그는 그 시절의 기억을 ‘고난과 역경’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그는 단 한번의 지원으로 마지막 4차 전형까지 합격했고, 그 뒤 주말연속극 <그대를 알고부터>에 바로 캐스팅됐다. “여기까지는 좋았어요. 하지만 그 뒤엔 정말 힘들었죠. 동기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청문회까지 한 적도 있어요. 대본 리딩을 하기 위해 다 같이 모였는데, ‘빽’으로 들어왔냐고 묻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 뒷조사까지 다 했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마연성처럼 잔머리로 위기를 모면하진 않았다. “당시엔 매우 힘들었지만, 동기들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물론 저는 ‘아니다’ 싶은 사람과는 다시 안 보는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그때 일은 이해할 수 있고, 지금도 동기 중 몇명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고난과 역경이 지나가면 행복이 찾아오듯, 그의 연기 생활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또래 배우들과 함께한 <돌려차기>는 개봉 당시 흥행도, 평가도 좋지 못했지만 김태현에겐 좋은 추억이 됐다. “솔직히 <돌려차기>는 실패해도 괜찮은 영화였어요. 젊은 배우들끼리 뭉쳐서 ‘으쌰으쌰’ 했던 거니까요. 당시 김영호, 김갑수 선배님만 빼면 다들 초짜였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선 다들 저보고 ‘쟤는 연기 좀 했지’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아마 이번의 태규만큼 부담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촬영 끝나고 남상국 감독님이 ‘중심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기분 좋더라고요.”

그 이후, <돌려차기>는 <방과후 옥상>으로 가는 다리가 되어줬다. 이석훈 감독(<방과후 옥상>)은 <돌려차기>를 보고 김태현에게 캐스팅 제안을 했고, 김태현은 시나리오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A4용지 3장으로 제출했다. “당시 마연성 역의 후보가 많았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첫 미팅을 했는데, 감독님과 PD만 제외하고는 다 ‘노’를 하신 거예요. 저는 얌생이가 아니래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하는 편이거든요.” <방과후 옥상>에서 김태현은 자유로워 보인다. 얄밉지만 밉지 않은 몸짓이 ‘제대로 웃긴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에게 ‘절제의 미덕’을 가르쳐준 경험이었다. “솔직히 오버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저랑 태규랑 현장에서 만나면 시끄러워지거든요. 정말 애드리브도 하고 싶고 더 웃기고 싶은데, 감독님이 자제하라고 하셨어요. 지금 영화를 보면 감독님 말씀이 옳았던 것 같아요. 저는 누군가가 조절을 안 해주면 정말 갈 데까지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번엔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김태현은 ‘무색의 마스크’을 지녔다. <방과후 옥상>을 마친 지금, 그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는 코미디가 아닌 공포물이다. 그래서 그가 마연성의 이미지로 고정될 확률은 낮아 보인다. 어떤 역할도, 어떤 장르도 그에겐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는 닮고 싶은 배우가 많아요. 주드 로, 알 파치노, 주성치, 콜린 파렐 등 정말 멋있잖아요. 그리고 해보고 싶은 역할은 악역이나 성격이 강한 역할. 아, 정통 드라마도 해보고 싶고요.” 그를 화가를 기다리는 ‘충무로의 하얀 도화지’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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