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김유석)은 7년째 데뷔작을 기다리는 만년 영화감독 준비생이다. 하지만 그를 응원하는 어린 아들 병국(강산)의 웅변을 빌려 말하자면, 그도 엄연히 영화감독이다. “영화 한편도 안 만든 영화감독이 어디 있느냐”는 친구의 놀림에도 병국은 “수박장수가 하루 종일 수박 한개를 못 팔았다고 수박장수가 아니냐”고 응수하며 아버지를 변호한다. 한편 상훈에게는 아들 병국처럼 힘이 되는 응원 가족이 있는가 하면, 함께 사는 장인처럼 애먹이는 가족도 있다. 치매에 걸려 툭하면 가출하는 장인(이순재)은 시간 많은 상훈이 주로 돌보아야 하는 골치 아픈 보호대상이다. 장인은 젊은 시절 역마살 낀 삶을 살았고, 가무를 낙으로 여기며 살아온 소문난 한량이었고,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서로 배다른 아들딸을 낳았지만, 지금은 치매로 그들을 구별조차 못하며 막내딸 민경(김호정)의 집에 얹혀산다. 민경, 남편 상훈의 소개에 의하면 그녀는 촉망받는 무용가 지망생이었지만, 지금은 아귀같이 소리지르며 학원생들을 호통치는 억척이 무용학원 원장이다. 동시에 그녀는 아들 병국과 남편 상훈과 아버지의 생계까지 모두 떠맡고 있는, 지치고 상처받은 이 집안의 진짜 가장이다. 바로 이들이 <모두들, 괜찮아요?>의 가족 구성원이다.
이 가족에게 괜찮지 않은 일들이 조금씩 벌어진다. 착하기는 하지만 실없이 구는 상훈이 다른 여자에게 과도한 친절과 관심을 표하면서 아내 민경은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게다가 민경의 배다른 오빠가 아버지를 찾아오며 집안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그런 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몰래 녹음기를 켜두고 있던 상훈의 행동이 결국 부부싸움을 불러 별거에까지 이른다.
<모두들, 괜찮아요?>의 애초 제목은 <영화감독이 되는 법>이었다. 제목이 바뀐 것인데, 내용을 이해하는 표지로는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상훈은 말끝마다 영화감독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실상 영화에는 상훈의 사회적 처지를 절실하게 상기시킬 만한 내용, 즉 영화감독이 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절차를 밟는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는 일화가 거의 없다. 동료의 촬영장에서 잠깐이나마 현장의 공기를 맡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도다. 일화는 오로지 가족간 관계 내에, 그것도 언제나 화해 가능한 상태로만 잠재적으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식으로 뒤덮인 사회의 일면을 비릿하게 풍자하거나, 그 반대로 아름다운 꿈을 잡기 위해 무작정 갈망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처럼 교수가 되기 위해 돈을 갖다바치거나 억지로 폭탄주를 마셔야 하는 사회적 설움의 에피소드, <불후의 명작>처럼 로맨스로 현시된 사회적 인정의 판타지 등으로 나아가지 않는 영화다. 인물들이 고민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 집안, 이 가족의 문제다. 그러므로 <모두들, 괜찮아요?>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하나쯤 속해 있는 어느 서민층 가족 공동체의 이야기다.
남선호 감독은 그 이야기를 하는 방법으로 자전적 경험에서 영화의 상당 부분을 뽑아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장편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상황 자체가 그 자신의 경험이고, 영화 속 가족 캐릭터의 구현도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며 가공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전적인 솔직함에 기초하면서도 자기 연민으로 채워진 일기장이나 반성문이 되지 않은 것은 이 영화의 큰 장점이다. 게다가 역량있는 배우들과 그들이 맡은 흥미로운 인물들은 서로를 잘 찾아들어 그 장점을 더 살려준다. 대체로 3인의 배우들- 김유석, 김호정, 이순재- 은 각자의 초상을 잘 그려내는데, 그중에서도 민경 역을 맡은 김호정은 천성적으로 갖고 있는 여러 음색의 목소리를 잘 드러낸다. <플란다스의 개>에 비슷한 역할을 맡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각자의 초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으로 놓고 보아야 의미가 통하는 가족 초상에 관한 삼면화라고 이 영화를 이해할 때, 서로의 화폭이 묶여 뭔가 흥미로움을 발생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건 이상하게 이 영화에 강박적으로 배어 있는 소박함의 지향 때문에 생긴 결함이 아닌가 싶다. 소박해야 한다는 자기 규율의 느낌, 그건 저예산의 표현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되도록 영화를 거창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의식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뭔가 수사와 장치들이 따라붙으면 안 된다고 결정한 셈이다. 하지만 소박한 인물들을 살게 하는 것과 영화 자체가 소박한 무엇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다.
물론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빈자들의, 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힘을 내는 빈자들의 영화’라 불릴 만한 구석이 있다. 이건 결국 같은 의미에서 서로 사랑하는 개털 인생에 대한 영화다. 답답한 마음에 점집을 찾아간 민경에게 무속인은 남편 상훈을 가리켜 ‘개털 인생’이라고 말하는데, 상훈만 개털인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상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촉망받는 무용가의 꿈을 접고 힘들게 학원을 운영하는 민경도 개털이고, 세월의 힘에 밀려 자아를 잃고 육신만 남은 그녀의 아버지도 개털이다. 그리고 그걸 보는 관객도 상당수는 그들만큼 개털이고, 빈자다. 모두들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 그런 마음에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 삶의 암담함이 목까지 차올라 점쟁이라도 찾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면 이 가족의 초상을 감싸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여기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다. 영화가 항상 영화적인 말걸기를 따로 시도해야 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비영화적인 면에 의해 이해 가능한 영화가 된다는 것은 영화로서는 슬픈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 영화는 일반 모두를 겨냥해 보편적 감정이 전달되기를 희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 더 풍부한 조음이 필요했거나, 더 집요한 천착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남는다. 비유컨대 <모두들, 괜찮아요?>는 재즈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운 무언가로 받아들여지길 스스로 희망한 것 같은데, 의아한 건 그 백미가 될 만한 즉흥연주를 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